항목 ID | GC079007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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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聖敎 |
영어공식명칭 | Jeong Seonggy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579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다혜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 정성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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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3·1운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일 - 정성교 북면 만세시위 참여 |
거주|이주지 | 정성교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579 |
활동지 | 정성교 북면 만세시위 참여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북면 만세시위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정성교(鄭聖敎)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아버지는 정광덕(鄭光德), 동생은 정한교(鄭漢敎)이다. 1891년에 태어났다. 가평군에서 북면 만세시위가 일어났을 때 가평군 북면 목동리 579에 거주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영향으로 가평군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가평읍에서 사숙을 운영했던 이규봉(李圭鳳)은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에 참여했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휴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규봉의 아들 이윤석(李胤錫)과 정재명(鄭在明)에 의해서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참여를 촉구하는 격문이 가평군 북면 내 주민들에게 알려지자, 정성교는 이에 동의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5일 북면사무소 앞에서 수백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가 그 일부가 가평 헌병분소로 끌려갔다. 정성교는 이튿날인 3월 16일 전날 체포된 주민들을 석방하기 위해서 약 200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북면 목동리에 모여 이들을 통솔하며 가평 헌병분견소로 이동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이송되어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