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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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漢敎 |
영어공식명칭 | Jeong Hangy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다혜 |
출생 시기/일시 | 1880년 - 정한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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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정한교 3·1운동 참여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일 - 북면 만세시위 전개 |
몰년 시기/일시 | 1937년 - 정한교 사망 |
출생지 | 정한교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
거주|이주지 | 정한교 이주지 - 서울특별시 소격동 |
묘소 | 정한교 묘소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3·1운동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정한교(鄭漢敎)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아버지는 정광덕(鄭光德), 형은 정성교(鄭聖敎)이며, 1880년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정한교는 『독립신문』을 편집하였던 이광수(李光秀) 밑에서 편집에 관한 일을 맡은 적이 있어 이를 계기로 인쇄 편집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전개된 3·1운동 당시 신숙(申肅)[1885~1967], 민영순(閔泳純)[1879~1929]과 함께 천도교 측 간사로 활동하였다. 정한교는 1919년 3월 1일 오후 3시경, 일본 경찰에 의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으나 민족대표가 아님을 판단하고 당일 오후 8시경에 풀려났다.
종로경찰서에서 풀려난 정한교는 화개동[현 소격동] 집에서 신숙, 민영순과 함께 앞으로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그의 스승인 이규봉(李圭鳳)이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려고 상경하였다가 정한교의 집에 들렸다. 정한교는 신숙, 민영순과 함께 이규봉에게 3·1운동 소식을 가평에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여, 가평에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만세시위가 일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묘소]
정한교의 묘소는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