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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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憲敎 |
영어공식명칭 | Jeong Heongy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범성 |
출생 시기/일시 | 1865년 - 정현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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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16일 - 정현교 북면 만세시위 참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북면 만세시위 주도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출신 독립운동가.
[가계]
정헌교(鄭憲敎)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아버지는 정광은(鄭光殷), 형은 함께 북면 만세시위에 참여한 정순교(鄭順敎)이다. 가평군 북면 출신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생몰년도는 확인할 수 없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가평에서도 3월 15일과 16일 만세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를 주도한 것은 가평군 북면의 주민이었다. 당시 목동리(沐洞里) 이장이던 이규봉(李圭鳳)은 고종의 인산일에 맞추어 서울에 갔다가 만세시위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마침 서울에 있던 제자 정한교(鄭漢敎), 신태연(申泰鍊), 민영순(閔泳純)을 만나 경위를 듣게 되었다. 이규봉은 「독립선언서」 2매와 『독립신문』 1매를 가지고 가평으로 돌아온 뒤, 자신의 장남 이윤석(李胤錫)과 제자 정흥교(鄭興敎)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이들의 지지를 확인한 이규봉은 이튿날 장기영(張基英), 정성교(鄭聖敎), 이만석(李萬錫), 정재명(鄭在明), 이병찬(李炳贊) 등에게 만세시위의 계획을 이야기하였고, 3월 15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천도교인들과 힘을 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아낙네들의 도움을 받아 태극기 1,800여 개, 비밀통문 500여 매를 제작하였다. 3월 14일 밤 정기복(鄭基福), 정천수(鄭天洙), 최인화(崔仁和) 등을 통해 북면의 목동리(沐洞里)·소법리(所法里)·화악리(華岳里)·제령리(濟寧里)·도대리(道大里)·백둔리(栢屯里)·이곡리(梨谷里)에 비밀통문을 전달하고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튿날인 15일 오전9시 경 이윤석과 정흥교를 중심으로 주민 수백명이 북면사무소로 몰려들어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를 외치며 가평 읍내로 진출하였고, 가평 읍내의 관청과 공공기관으로 나누어 몰려들어 만세를 외쳤다. 김정호(金定鎬), 최기홍(崔基弘), 장귀남(張貴男), 김창현(金昌鉉) 등 가평 읍내 주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무리는 점점 늘어났으며, 일본 경찰과 관헌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만세시위는 저녁에 들어서야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3월 15일 저녁 일본 경찰은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규봉, 이윤석, 최기선(崔基善), 최인화, 최종화(崔宗和), 최용화(崔容和) 등을 체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장기영 등은 이튿날 아침 북면 주민 200여명과 함께 목동리의 성황당에 모여 구금된 인물들을 구출하러 이동하였다. 주민들이 당고개를 지날 무렵 헌병들이 이들과 마주하였고, 장기영 등은 헌병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거세게 저항하였다. 이로 인해 수십명이 일경에 체포되어 이 가운데 20여명이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기소되었다. 정헌교는 신문기록이나 판결문 자료가 없어 체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