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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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基太 |
영어공식명칭 | Choe Git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성주현 |
출생 시기/일시 | 1893년 - 최기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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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3·1운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일 - 최기태 북면 만세시위 참여 |
거주|이주지 | 최기태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리 |
활동지 | 최기태 북면 만세시위 활동지 - 경기도 가평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북면 만세시위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출신 독립운동가.
[가계]
최기태(崔基太)의 본관은 수성(隋城), 자는 병문(柄文)이다. 아버지는 최세순(崔世淳)이며, 1893년 가평군 북면 이곡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영향으로 가평군에서도 1919년 3월 15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가평읍에서 사숙을 운영했던 이규봉(李圭鳳)은 이윤석(李胤錫)·정흥교(鄭興敎)·정기복(鄭基福) 등과 함께 의논하여 주민들의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격문을 인쇄해 거리에 붙이고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만세시위 계획 과정에서 최기태는 최종화(崔宗和), 최용화(崔容和) 두 형제와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최기태는 1919년 3월 15일 북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참여하였으며, 3월 16일에도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가평군지』에 의하면 만세시위 이후 가평 읍내에 있는 친구 집에 은신하여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
최기태의 묘는 가평군 가평읍 마장리 장현(章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