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319
한자 高山縣
영어공식명칭 Gosan-hyeon
이칭/별칭 난등량(難等良)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정 시기/일시 1392년 - 운제현에서 고산현으로 편제
개정 시기/일시 1895년 - 고산현에서 고산군으로 편제
개정 시기/일시 1914년 - 고산현 전주군으로 통폐합
개정 시기/일시 1935년 - 고산현 완주군에 편제
관할 지역 고산현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지도보기

[정의]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통치구역.

[개설]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일대에 백제에서 조선시대까지 있었던 현으로, 1392년(태조 1)에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일대에 있었던 운제현을 통합했다. 1895년에 고산군으로 바뀌었으며, 1914년에는 전주군에 통합되었다. 1935년에 전주전주부로 승격하면서 다시 완주군으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산현은 백제에서 설치했으며, 통일신라·고려·조선 시대에까지 명칭의 변화가 없었다. ‘고산’이라고 하는 명칭은 백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권 제 36, 잡지 제 5, 지리 3, 신라, 전주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髙山縣, 本百濟縣, 景徳王改州郡名及今因之.”

『고려사』 권 57, 지 권 제 11, 지리 2, 전라도, 전주목, 고산현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高山縣本百濟高山縣[一云難等良], 新羅時, 來屬. 顯宗九年, 仍屬, 後置監務, 兼任珍同. 恭讓王三年, 又兼雲梯.”

『고려사』 권 134, 열전 권 제 47, 우왕 6년 7월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왜구가 서주(西州)를 침입하고, 이어 부여현(扶餘縣)·정산현(定山縣)·운제현(雲梯縣)·고산현(高山縣)·유성현(儒城縣) 등지를 침략하였다가 마침내 계룡산(雞龍山)으로 들어갔는데, 부녀자와 아이들이 왜구를 피해 산으로 올라갔다가 대부분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양광도원수(楊廣道元帥) 김사혁(金斯革)이 왜구를 공격하여 쫓아버렸다. 이에 왜구들이 청양(靑陽)·신풍(新豐)·홍산(鴻山) 등지를 약탈한 뒤 가버렸다.”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전주부 고산현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본래 백제의 고산현이었는데, 신라에서 전주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본조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운제현(雲梯縣)을 [본래 백제의 지벌지현(只伐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운제현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전주(全州)에 붙이었다.] 이에 내속(來屬)시켰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서·남쪽으로 전주(全州)에 이르는데, 동쪽이 35리, 서쪽이 14리, 남쪽이 7리요, 북쪽으로 여산(礪山)에 이르기 20리이다. 호수가 2백 60호요, 인구가 2천 28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이 16명이요, 진군이 48명이요, 선군이 44명이었다. 토성(土姓)이 4이니, 고(高)·송(宋)·전(全)·배(裵)요, 망성(亡姓)이 1이니, 가(價)이다. [어떤 본(本)에는 ‘가(賈)’로 되었다.] 운제(雲梯)의 성이 5이니, 배(裵)·백(白)·수(水)·송(宋)·유(兪)이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춥다. 간전(墾田)이 3천 1백 16결이요, [논이 6분의 1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목화·닥나무이다. 토공(土貢)은 삵괭이가죽·족제비털[黃毛]·대추·감·석류·석이·칠(漆)·인삼·자리·지초(芝草)·꿀·밀[黃蠟]이요, 약재(藥材)는 흰바곳·당귀(當歸)·녹각교(鹿角膠)이다. 철장(鐵場)이 1이요, [현의 북쪽 번북동(番北洞)에 있는데, 연철(煉鐵)·정철(正鐵) 7백 4근 12냥쭝을 군기감(軍器監)에 바친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요, [현의 남쪽 진서동(秦西洞)에 있다.] 역(驛)이 1이니, 옥포(玉包)이다.”

『신중동국여지승람』 제 34권, 전라도, 고산현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본래 백제 고산현 난등량(難等良)이었는데, 신라 때 전주에 붙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 그대로 붙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어 진동(珍同)을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조에 다시 나누었고,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대동지지』 전라도 고산현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현내(縣內) 끝이 10리. 동면(東面) 처음이 5리, 끝이 10리. 남면(南面) 처음이 5리, 끝이 10리. 서면(西面)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북면(北面) 처음이 5리, 끝이 30리. 운동(雲東)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운서(雲西)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운북(雲北)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위의 3면은 운제(雲梯)의 옛 현이다.”

[내용]

고산현은 백제 때에 설치된 현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했다. 난등량이 백제 때에 부르던 명칭인지, 아니면 별칭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통일신라 때에 전주에 소속되었으며, 1018년(현종 9)에 계속해서 전주에 속하게 되었다. 뒤에 감무를 두었으며, 고산감무는 진동(珍同)을 겸직했다. 1390년(공양왕 3)에는 운제현의 감무도 겸직했다. 1378년(우왕 6)에 왜구가 부여현(扶餘縣), 정산현(定山縣), 운제현(雲梯縣), 고산현(高山縣), 유성현(儒城縣) 등지를 침략했을 때 많은 피해를 보았다. 1392년(태조 1)에 운제현고산현에 통합했다. 뒤에 진동감무는 별도로 나누었다. 감무에서 현감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의 현내(縣內), 남면(南面), 서면(西面), 북면(北面)이 고산현의 관할이었으며, 운동(雲東), 운서(雲西), 운북(雲北)이 운제현의 관할이었다.

[변천]

백제 때 고산현이 설치되었으며, 1392년 운제현을 통합했고, 1895년 고산군으로 변경되었다. 1914년 고산군은 전주군에 소속되었으며, 면체제로 전환되어 고산면이 되었다. 1935년에 전주전주부로 승격되면서 전주부와 완주군으로 나뉘게 되면서 완주군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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