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895
한자 儒敎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집필자 유호석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에 유입되어 발전한 유학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르는 용어.

[유교의 도입]

전라북도 완주 지역에 유교가 정확히 언제 유입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백제 때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들어오면서 전라북도 완주에도 차츰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4세기 경에 근초고왕[346~375]이 박사 고흥(高興)에게 『서기(書記)』라는 이름의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했는데, 박사의 칭호로 미루어 당시 백제에는 이미 대학 제도와 전문 학자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또한 중국에서 모시박사(毛詩博士)와 강례박사(講禮博士)를 초빙하고 있어서, 유교의 경전사상을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 대에는 왕자 아직기(阿直岐)와 박사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 유교 경전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전달하고 있는 등 경전에 대해 이미 상당한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왕조 교체기의 유교]

고려왕조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기에 축적된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해 나갔다. 고려의 유교, 특히 고려 말에 주자학(朱子學)이 들어오기 전까지 유교는 불교, 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공존했다. 즉 정치이념으로 유교를 받아들이고, 유교적 교양을 갖춘 인재들을 과거를 통해 관계에 등용하면서 다양한 유교문화가 발전되었다. 반면, 고려를 불교국가를 일컫는 데서 보듯이, 정치는 물론 문화와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불교의 영향은 지대했다. 그러나 문헌과 유물로서 유교가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일이다. 특히 정부의 배불정책(排佛政策)으로 인해 고려시대에 불교가 갖고 있었던 위상은 크게 떨어졌다. 그리고 주자학(朱子學) 또는 성리학(性理學)이 조선의 유학에 대한 정통으로 자리 잡음에 따라 유교의 질적 수준 내지 깊이는 더욱 심화되었다. 유교는 조선을 살던 모든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종교가 되다시피 했다. 이곳 전라북도 완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양반 사대부들의 주자학에 대한 배타적인 수용과 편협한 사고는 복제(服制) 문제를 둘러싼 예론(禮論)에서 보듯이 격심한 당쟁(黨爭)과 어우러지면서 많은 정치적 사회적 폐단을 일으켰으며, 결국 조선왕조 멸망의 주요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조선시대 완주의 유교적 유산]

유교는 국내의 다른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완주에서도 중국의 공자를 시조로 하는 전통적인 사상은 물론,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수용 발전해 나가면서, 현실 정치와 사회생활 및 가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완주 지역에서의 유교의 흔적을 살펴보면, 1398년(태조 7)에 고산향교가 지금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에 창건된 점을 손꼽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유생들을 대상으로 유학을 교육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도 유교 도덕을 바탕으로 하는 미풍양속을 고취함으로써 이 지역 유교 발흥의 본거지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많은 서원과 원우(院宇)들이 설치되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완주 지역에도 적지 않은 서원과 원우들이 설치되었다. 국왕으로부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칭호를 받은 화산서원봉강서원을 비롯해 백현서원, 구호서원, 천곡서원, 봉양서원, 학천서원, 호산서원, 청하서원, 호산서원, 청하서원, 반곡서원, 용진서원 등 10여 곳 서원이 설치되었으며, 보광사, 예산사, 대승사, 삼현사 등과 같은 사우들도 설치되었다. 이들 전라북도 완주 지역의 서원은 대체로 17세기 이후에 창건되었으며, 거의 모두가 흥선대원군 집정 때 훼철되었다가 일제강점기 또는 해방 이후에 중건되었다.

전라북도 완주에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나라로부터 정려(旌閭)를 받은 효자와 효부, 열녀들도 많이 나왔다. 효자로는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오산리구석린을 비롯 강기환, 김광중, 김기도, 김기종, 김기헌, 김복규, 김상삼, 김수철, 김원, 나한정, 박동순, 박상순, 백치언, 송상복, 신경은, 심계현, 양두흥, 오령로, 오희첨, 유석진, 유우근, 이광준, 이기, 임상인, 장개남, 장몽웅, 정우홍, 채홍염, 최성전, 탁경춘, 탁율 등이 있었다. 효부로는 임덕홍의 처 국씨, 박형문의 처 김씨, 최관철의 처 김씨, 정주현의 처 김씨, 송유의 처 박씨 등이 있었고, 효열부로는 배현장의 처 강씨, 김영태의 처 강씨, 국은환의 처 고씨, 임병홍의 처 구씨, 배문영의 처 김씨 등이 있었다. 이들은 부모나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했으며, 병든 남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 유교가 기층민 사회에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완주의 유학자들]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로는 소양 출신의 최양(崔瀁)이 있다. 최양은 외삼촌 정몽주(鄭夢周)에게 수학했으며,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해 이부상서와 대제학 등을 지냈다. 1392년에 조선이 개국한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전주에 은거했다. 저서로는 『만륙일고』가 있다. 조선 전기의 인물 중에 정몽주의 문인으로는 최광지(崔匡之)가 있는데, 포은의 학통을 이어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유숭조(柳崇祖)는 학문적으로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뒤를 이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데, 당대 학자들은 조선조 경서의 언해는 유숭조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유숭조는 또 성균대사성으로 언해를 지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조선의 유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유구(柳玖)는 단종이 죽자 고향에 은거하면서 후진을 가르치는데 노력했다. 유구 문하에 이계맹(李繼孟)이 있으며, 용강서원에 제향되었다.

구영(具塋)은 예론(禮論)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성리학을 배웠다. 구영은 광해군 시절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논의에 분개해 폐비에 찬동하는 상소를 올렸던 유응원의 글을 구해 불사를 만큼 격정적인 인물이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정리해 의병장 정홍명(鄭弘溟)의 막하에 들어간 군무를 담당했다. 판소리의 명창 권삼득(權三得)의 부친인 권래언(權來彦)은 향리에서 경학에 밝은 거유(巨儒)로 이름난 인물이었다. 권삼득의 문집으로 『이우당문집(二友堂文集)』이 있다. 임윤성(任尹聖)은 이황과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마해 『용학문답(庸學問答)』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홍남립(洪南立)은 어려서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자라서는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6경을 배웠다.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들어간 뒤에는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다.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으로 싸웠고, 전주의 학천사(鶴川祠)에 제향되었다. 이흥발, 기발, 생발 삼형제, 이후선, 순선 형제들과 함께 전주 팔현(八賢)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최명룡(崔命龍)은 율곡 이이(李珥)의 고제인 이정기(李正祺)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뒤에 신중경(申重慶)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음양, 천문, 지리, 도교, 불교와 산학에 정통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조선 후기 영조 대의 장원급제자 목산(木山) 이기경(李基敬)은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최명룡의 저서 『인물성동이고(人物性同異考)』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홍매산(洪梅山)이 호남의 이학(理學)은 하서(河西)에서 비롯해 목산(木山)에서 끝난다고 언급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19세기로 들어가면 훨씬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몇 사람의 이름들만 아래에 기재해 둔다. 한진석(韓晉錫), 유민(柳旼), 전경표(全景杓), 조영래(曺榮來), 정종호(鄭宗好), 유중억(柳重億), 임주철(林周喆), 구연창(具然昌), 임병택(林炳擇), 오영익(吳甯翼), 오병훈(吳秉勳), 소학규(蘇學奎), 이병은(李炳殷), 전구현(全九鉉), 홍경하(洪景夏), 임병지(林炳志), 구영조(具榮祖), 국영환(鞠瑛煥), 김정만(金正萬), 국용환(鞠庸煥), 박해관(朴海寬), 조동환(曺東煥), 조석하(曺錫河), 소태술(蘇泰述), 이도형(李道衡), 이대원(李大遠), 오형선(吳衡善) 등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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