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이 동학을 하게 된 연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1210
한자 全琫準-東學-緣由
영어공식명칭 The Reason that Jeon Bong-jun do Donghak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영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2001년 8월 7일 - 「전봉준이 동학을 하게 된 연유」 황인덕이 오용근에게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1년 12월 29일 - 「전봉준이 동학을 하게 된 연유」『완주의 구전설화』에 「전봉준이 동학을 하게 된 연유」로 수록
채록지 「전봉준이 동학을 하게 된 연유」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안동김씨|조대비|흥선대원군|전봉준
모티프 유형 전봉준|동학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에서 전봉준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

[개설]

전봉준[1855~1895]은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데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전봉준은 1890년(고종 27) 무렵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인물담들은 보통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지역민에게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형성되어 전승된다. 「전봉준이 동학을 하게 된 연유」에서는 전봉준에 대해 전라북도 완주 지역민의 시각을 읽을 수 있다.

[채록/수집 상황]

「전봉준이 동학을 하게 된 연유」는 황인덕이 2001년 8월 6일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구암마을 오용근[남, 71]에게 채록해, 『완주의 구전설화』[신아출판사, 2001] 105~110쪽에 「전봉준이 동학을 하게 된 연유」로 수록했다.

[내용]

조선 말기에 철종이 아파서 생명이 위태로운 시기는 안동김씨 장동파가 60년 정권을 잡고 있었던 때였다. 안동김씨가 조정의 모든 대신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국모[왕후] 또한 안동김씨가 되었다. 이때 전봉준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드센 안동김씨들 사이에서 걸인 행세를 하며 살아갔다. 그런데 철종이 후사[왕위를 계승할 아들]가 없이 승하하자, 안동김씨 반대파인 조대비가 재빨리 옥새를 거두어 안동김씨의 반대 기회를 봉쇄하고 이하응[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철종의 양자로 들여 왕[고종]으로 세웠다. 그러나 고종은 어려서 흥선대원군이 섭정하게 되고,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공사를 하기 위해 세금을 심하게 물리고 매관매직까지 서슴지 않았다. 고을 수령들은 수령들대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가렴주구[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음]를 하였다. 특히 고부현감 조병갑이 백성의 재산을 갈취하는 사건이 발단되었다. 전봉준은 관리들에게 수탈당해 죽으나, 관군에게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여러 추종자와 함께 동학을 일으켰다.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구암마을에도 전봉준을 따라다닌 분이 한 명 있었는데, 관에 붙잡혀 죽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전봉준이 동학을 하게 된 연유」는 ‘전봉준’이라는 실존 인물과 ‘동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전봉준이 동학을 하게 된 연유」 이야기는 전봉준이 동학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 정황과 이유를 실제 상황과 아주 비슷하게 설명하며 전봉준의 동학운동에 공감을 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마지막에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구암마을에서도 전봉준을 추종한 인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실존 인물인 전봉준에 대한 구연자의 긍정적 시각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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