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한국 토종 생강 농업의 종가, 완주봉동생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1379
한자 -歷史-傳統-韓國土種生薑農業-宗家, 完州鳳東生薑
영어공식명칭 Head House of Ginger Agriculture indigenous to Korea, have a long history and tradition, Wanjubongdong Jinger
이칭/별칭 봉상생강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일대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선태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봉상면과 우동면에서 이어오고 있는 토종 생강 농업.

[개설]

전라북도 완주군의 ‘완주봉동생강’이란 대한민국 생강농업의 대명사로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생강농업을 이어가는 종가의 위상을 갖춘 곳으로서, 1935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봉상생강’ 을 현재 행정구역명인 봉상면과 우동면을 통합해서 봉동생강으로 부르고 있다.

[봉동생강의 역사]

전라북도 완주군의 완주봉동생강은 한국 생강농업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완주군 봉동읍 봉실산 자락의 은상마을, 신봉마을, 추동마을에는 각각 지석묘로 추정되는 세 개의 바위들이 존재한다. 항간에는 이 바위 밑에서 자라는 향초를 ‘시앙’ 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전승되면서 ‘구바위’ 설화가 존재하는데, 이밖에도 이서구 예언설, 기자조선 유래설, 신만석 유래설 등 봉동생강에 관한 설들이 풍성하다. 이 모든 유래는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 지방이 한국 자생 생강을 최초로 재배한 시배지임을 뒷받침한다. 한국 생강의 역사로 전승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문헌에는 “북쪽 변방에 전사한 장수와 병졸의 부모 처자에게 차, 생강, 베를 하사하다”[『고려사』 7권 제35, 1018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을 통해 당시 ‘생강’이 ‘차’, ‘베’와 함께 매우 귀한 하사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 태종14년의 기록은 봉동생강과 개연성이 있다. 당시 문헌에는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청원군 심종(沈悰)의 죄를 청하였으니, 심종이 지난해 가을에 어가(御駕)를 따라 남행(南幸)하였을 때에 몰래 방간(芳幹)이 보낸 생강을 받고도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로 기록되어 있다. 짧게 요약하면, 1414년 ‘남행하던 심종이 이방간에게 생강을 받고도 임금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당시 생강은 전주부에서 유일하게 생산되었고, 회안대군 이방간의 후손들이 당시 전주부이던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방간이 보낸 생강’은 완주봉동생강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밖에도 『세종실록 지리지』[1454], 『동의보감』[1610], 『도문대작』[1611], 『택리지』[1751], 『북학의』[1778], 『임하필기』[1871] 그리고 일제강점기 중추원 봉상시장 조사자료 기록[1918]에도 봉동면 장기리[현 봉동읍 장기리] 시장의 주요 상품으로 소개되는 등 각종 문헌에서 봉상생강에 관한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한편 생강농업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끈 것은 일제강점기 윤건중이 주도한 봉상산업조합의 설립이었다. 전통적인 농업방식에서 근대 생강농업과 협동조합 형식의 유통구조를 개선하여 연간생산량 12만 섬에 이를 정도로 봉동생강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봉동생강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 ‘봉상생강’으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그 위상이 높으며, 한국 생강농업의 종가로서 전통생강농업의 맥을 지켜가고 있다.

[봉상산업조합]

전라북도 완주군에 존재했던 봉상생강협동조합은 근대 농업조직의 토대이자 최초 생강 협동조합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현재 봉동생강조합은 1930년에 설립한 봉상산업조합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1930년 신문 기사에서 봉상산업조합은 제9대 농업 장관이던 윤건중의 노력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고 일부 수익금을 지역사회에 환원시키는 등 당시에는 파격적인 운영으로 모범을 세웠다. 봉상산업조합은 이익금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여 부설 의료원을 봉동에 설립, 운영하였다. 당시 조합에서는 2,000여 원으로 봉동산업조합 부속병원 건물을 신축하여 전주에서 의사 양해용이 하루 한 차례 출장 진료를 하는 등 지역의료 복지 체계를 마련하는 선진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봉동은 근대 농업의 선두지역으로 전국적인 모델이 되었다. 당시에 설립된 부속병원은 비록 개인 소유지로 되어 있으나 여전히 이전 모습을 유지하며 근대 농업사 건축물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봉상산업조합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9월 4일 사장 이준목(李俊穆), 중역 윤건중(尹建重)이 중심이 되어 봉동 지역 특산 생강농업 생산과 유통 확대를 목적으로 하여 봉상산업조합을 낙평리에 설립하여 봉상생강이 전 조선의 대표적 수출 특산물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문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朝鮮의 特産인 鳳翔生薑獎勵 각지에 선전원을 파견 薑農者千三百戶

전북 전주군 봉동면에서 산출하는 봉상생강은 전조선을 총하야 수출되는 특산품인만큼 1년의 산출되는 수량도 1만5천석으로 그의 산액이15만원에 달하야 그 지방민은 주업으로 경작하나... [후략]”

이 내용은 봉상생강이 1930년대 전조선의 대표적 수출 특산품이었으며, 봉동 지역에서 수천 년 전부터 전해오던 재래식 재배를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영남·관북·서조선 등지에서 선전원을 파견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재배법과 채취방법을 교육하는 등 당시 생강농업이 선진농업이며 생강이 부가가치가 높은 특산품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봉동생강 농업의 중심지 가운데는 낙평리가 있다. 낙평리의 마을 지도자들이 근대 생강농업 방식을 받아들였기에, 생강의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가 되어 전국적인 판로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2016년 완주군 봉동생강은 466농가가 있는, 111핵타르의 면적에, 1176톤이 생산됨으로써 32억 5,000만 원의 소득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봉동읍이 생강농업에서는 독보적인 생산을 하고 있다. 특히 낙평리는 완주군 생강재배 현황 통계에서 봉동생강 농업의 원적지를 자임하듯, 출하금액과 생산량이 월등하게 높은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봉동생강구술사]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생산되는 봉동생강은 한국의 농업유산답게 새로운 문화로 창출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생강 팔러 각지로 다니며 겪은 사연들이다. 이렇게 생강을 전국으로 팔러 다니게 된 것은 김장하려면 반드시 생강을 넣는데 그 가운데에도 봉동생강 품질이 가장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생강 팔러 간 이야기’이다. 신성리에 거주하는 상씨름꾼 임병용이 들려주는 일제강점기 시절 이야기를 옮기자면, “이북 안 막혔을 적에는 평양 만주까지 갔었디야. 만주 가면서 생강 부친다고 하잖아요. 딱 거기서 생강 다 팔고 돈 벌어갖고 딱 와. 그러면 아버지랑 한 이틀씩, 3일씩 이야기 혀. 밤새도록 이야기혀. 암먼 아버지 술 좋아했지. 그 양반은 지금까지도 안 와. 만주 가 가지고. 그 양반이 키가 막 그 양반이 구척이여. 수염이 막 이렇게 났어. 검정수염이여, 수염도. 지금도 이렇게 보면 흰 수염이 아니여. 여기 지금 신성리 사람이여”라는 것이다. 임병용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을 사람이 만주까지 가서 생강을 팔고 돌아오면 그의 부친과 만나서는 며칠간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밖에도 ‘원주 시장 통 상인들과 호기롭게 다툰 이야기’, ‘제주도에 가서 생강을 다른 물건들과 교환할 수 있을 정도로 대접을 받았던 이야기’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둘째는 생강이 생금인 이야기이다. 생강은 예로부터 귀한 향신료이자 식품이었다. 그래서 생강은 다른 작물에 비해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니쿠사쿠[생강 배낭] 한 통 둘러매고 나가면 쌀 몇 섬을 살 수 있다”거나 “생강 장사하러 나갔다가 들어오면 논 서 마지기는 살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가 단지 지어낸 무용담이 아니라 현실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처럼 생강은 현금과 같은 구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금전적인 가치가 있었다.

셋째, 생강굴 관련 이야기다. 생강굴은 토종생강을 저장하는 곳이다. 생강의 수확 시기는 상강 무렵인데, 이때 수확된 생강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도와 습도를 지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장 최적의 저장방식이 생강굴이다. 또한 생강굴은 생강만을 저장하는 것이라 아니라 고구마, 감자, 토란과 같은 뿌리식물에서부터 오랫동안 저장 가능한 작물들을 같이 넣는 생활형 저온 냉장고이다. 또한, 일제강점기나 6·25전쟁 때 위기가 닥치면 피난이나 대피소 역할도 하였다. 생강굴의 깊은 지하에 유해가스가 발생하여 생강굴에서 농민이 목숨을 잃은 가슴 아픈 사연도 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수직형 생강굴에 들어가기 전에는 저장 굴에 신문지에 불을 붙여 생강굴 안으로 던져보는 것을 잊지 않기도 한다.

봉동은 생강 외에도 원예농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생강 농사의 중심지이자 이후 원예업이 왕성했던 낙평리에는 여성들의 밭농사 관련 이야기도 많다. ‘낙평리로 시집갈 때는 호미를 지고 가야한다’는 말이 있었어. 워낙에 밭일이 많아서. 일도 많고 살림도 고되니까 ‘악(惡)살림’이라고도 했제”라는 것이다. 생강을 수확할 때는 생강 자체가 고가이기 때문에 생강 뿌리부터 손질을 잘해서 담아두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수확한 생강의 상품성을 보다 높이기 위하여 검은 토양에서 자란 생강을 다시 황토로 묻히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봉동 낙평리 일대는 사질토 지역으로 물 빠짐이 좋으면서도 비옥하여, 토양이 검은색이어서 구매자들이 꺼리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판매 단계에서는 수확한 생강에 다시 고운 황토를 묻히곤 했다고 한다.

[봉동생강과 음식문화]

전라북도 완주군의 봉동 지역에는 독특한 생강 음식이 있다. 대개 생강은 향신료로 알려져 있으나 봉동 사람들은 갓 수확한 생강을 캐어 날 것으로 먹는 것을 별미로 여긴다. 또한 타지역과 달리 생강 뿌리와 함께 줄기, 잎까지도 음식물로 삼는다. 대표적인 것이 ‘강수’와 ‘개약’이다. 강수는 생강 뿌리 가운데 일부 길게 자란 뿌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려 김치처럼 먹는다. 또한, 된장 속에 박아 넣어 장아찌처럼 시나브로 반찬 삼아 먹고, 매운탕 등에 넣어 먹기도 한다. 개약[또는 개악]은 생강 수확 후, 생강 줄기와 잎을 통풍이 좋은 곳에 한두 달 매달아 삭힌 후, 물로 씻어 찧고 물기를 뺀 후에 햇빛에 말린 것을 일컫는다. 보통 고추장 또는 된장에 박아 놓고 여름 반찬으로 먹는다. 이 밖에 수확 과정에 여린 생강대를 총총 썰어 생강과 함께 매운탕에 넣어 먹기도 한다.

[한국 농업유산의 가치]

전라북도 완주군의 봉동생강은 한국 생강농업을 표상하는 고유한 농업유산이다. 첫째, 한국 생강농업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봉동읍 은하리 일대에는 생강 시배지 설화가 전승되고, 『조선왕조실록』에서부터 1930년 일제강점기 신문 보도 내용 등의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둘째, 고유한 생강 농업 전통 지식을 지니고 있다. 생강은 고온성 작물로 주로 열대와 고온 지역에서 재배가 가능한 식물이다. 따라서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에서는 겨울 냉해 피해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봉동생강는 씨종자생강[종생강]을 지하토굴에 저장하는 방식을 창안하여 한국 토종생강을 보존하여 생강농업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셋째, 봉동 지역 고유의 생강 문화가 전승되고 있다. 우선 봉동에서는 생강을 부르는 ‘시앙’, 또는 ‘샹’과 같은 지역 고유의 호칭이 존재한다. 그리고 생강농업의 독보적인 주산지로서 ‘강수’, ‘개약’과 같은 생강 음식문화가 있다. 또한, 생강은 양념 채소로서 한국 김장문화에 빠질 수 없는 조미채이다. 따라서 김장을 하는 때에 맞춰 한반도 북단의 만주에서부터 남녘 끝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생강을 판매하던 이곳 사람들만의 고유한 이야기 문화가 전승되고 있다. 따라서 봉동생강은 한국 고유 생강 보존과 독특한 농업 전승지식 그리고 지역 고유의 문화를 창출한 농업유산의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