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0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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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住生活 |
영어공식명칭 | Housing Lif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나정숙,심상미 |
[정의]
경기도 부천시에서 가옥을 기반으로 영위해 온 주거 형태와 공간 배치 및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생활.
[개설]
부천시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한 수도 서울의 남서부에 자리 잡고 있다. 급속한 도시화 정책으로 인하여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 때문에 도심 일대에서는 부천의 전형적인 주택을 찾아보기 힘들다. 몇 군데 마을이 옛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이곳에서 오래된 주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나, 이들 역시 대부분 개·보축되어 외관상으로는 현대의 건축으로 보인다. 간혹 그중에는 골격만은 그대로 유지된 채 상량문 등에서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현재 고택이 집중되어 있는 마을은 역곡동·작동[여월동]·대장동·범박동 등지이다. 시기별로 보면 청동기시대의 집터가 고강동에서 확인되었고,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것도 고강동에서 확인되었다. 최근에는 여월택지개발지구에서도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삼국시대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이후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현대의 집터도 발견되고 있다.
[주택의 종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살림집에 대해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살림집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관습과 사고방식을 담고 있으며, 또 살아가면서 그 틀을 ‘내것화’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살림집을 관찰해 보면 사람들의 생활상은 물론 집에 대한 사상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경우에 따라서는 살아가면서 생활에 맞춰 어떻게 주거의 틀을 바꾸었으며 그 변화된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 집과 생활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살림집은 주인의 신분과 경제적 능력에 따라 크게 양반 가옥인 반가(班家)와 서민 가옥인 민가(民家)로 나눌 수 있는데, 부천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부천의 반가와 민가는 규모뿐 아니라 구조, 가구 기법 등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같은 반가나 민가라 하더라도 집주인의 재력과 관습, 취향에 따라 형식도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1. 반가
1) 구조
부천의 반가는 ㅁ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사랑채의 남성 영역을 외부에 면하게 하고 안채의 여성 영역을 내부에 배치함으로써, 상류 주택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다. 더구나 사랑채와 안채의 각 영역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고, 이 두 채를 연결시키는 중문간에는 내외 벽을 설치하는 등 계층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여러 채가 형성되면서 각 채의 주변에도 여러 개의 마당을 만들어 다양한 공간을 형성하였다. 또한 안채는 물론 사랑채에도 대청마루가 형성되고 구조와 건축 기법에서도 상류 주택의 계층성을 보여 주고 있다.
2) 작동 고택 사례
부천시 작동에 있는 고택은 작동 고택, 혹은 민경홍 고택으로 알려져 있는 반가의 고택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본래 민경홍 가족이 살고 있었기에 ‘민경홍 고택’이라고도 한다. 이 집의 안채는 일제강점기 말에 개축을 해서 74년 정도 되었고, 사랑채는 150년 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집의 형태는 부천에서 보기 드문 왈(曰)자 형태로 되어 있다. 안채·사랑채·바깥채·광·부엌이 연결되어 있는 전형적인 ㅁ자형 형태이면서, 마당 한가운데에는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을 나눠 주는 담이 있었다고 한다. 부엌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안채와 바깥채가 있고 왼쪽으로는 사랑채와 광이 있다. 그러니까 중문을 들어서면 완전 별도의 두 공간이 자리하게 된다. 우물이 마당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고, 화단도 꾸며져 있다. 안채와 부엌이 연결되어 있으며 부엌 천장에는 다락이 있다. 부엌 뒷문을 열면 텃밭이 연결되어 있고 텃밭을 지나면 다른 집으로 연결되어 있다. 민경흥에 따르면 “전해 듣기를 이 집은 350년 전부터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주변은 대부분 초가집이었고, 양철집이 한 채 있었다고 한다. 이런 ㅁ자형 한옥은 양반 집에 속했고, 일반 서민 주택으로는 담과 마당이 없는 ㅡ자형이 대부분이었다.
2. 민가
1) 구조
부천의 민가는 ㄱ자형 안채와 ㅡ자형 혹은 ㄱ자형의 문간채[바깥채]로 이루어지거나 안채만으로 이루어지는 등 서민층의 계층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ㅡ자형이 많았다. 안채는 중부 지방형 ㄱ자 집이 많은데, 이 유형은 부엌과 안방, 윗방이 ㅡ자로 놓이고 윗방 전면에 대청과 건넌방이 있는 형식이다. 문간채는 농촌 민가에서 보이는 수장용 공간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부천 민가의 평면 유형을 기록한 자료가 많지 않아 자세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규모가 8자 정도가 되는 1칸 반의 안방, 1칸의 건넌방, 1칸 반의 마루와 부엌이 기본이었다. 그보다 어려웠던 하층민은 거의 마루를 놓지 못했고, 형편이 좋은 사람은 8~15칸 정도부터 30칸 가까이 되는 집을 지었다. ㄱ자형의 하층민 주택은 안방·건넌방·부엌으로 구성되었는데,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공간은 흙바닥이었다. 양쪽에 방을 드나드는 창호지 문이 있었다. ㅡ자형은 안방·건넌방·부엌이 나란히 놓여 있고, 문이 각 방의 앞쪽에 달려 있었다. 내부는 흙벽 그대로 쓰거나 헌 종이를 발랐고, 방바닥에는 대자리를 깔았다.
2) 공간 분배
전통사회의 대가족 형태는 공간의 분배를 통해서 가족 간의 위계를 정하였다. 주거생활과 관련해 시어머니가 적당한 시기에 며느리에게 안방을 물려주는 ‘안방물림’이 그것 가운데 하나이다. 부천에서는 안방에서 집안의 웃어른이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것은 안방이 윗방에 비해 더 따뜻한 것과도 관련이 깊다. 안방에 누가 거처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민가에서 안방물림은 안방과 건넌방을 서로 바꾼다는 외형적인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와 자식 내외의 거처가 서로 바뀌게 되며, 심지어 시어머니가 관리했던 집안의 경제권 등의 권한까지 며느리에게 양도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채는 주로 남자들의 공간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이다.
3) 난방
민가의 난방 연료로는 1970년대 초반까지도 나무를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콩깍지와 같이 곡식을 거두고 남은 것이나 산에서 긁어 온 ‘솔가래[솔가리]’를 쓰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 난방 방식의 변화가 시작되어 연탄이 보급되었고, 1990년대에는 연탄·기름·전기 등의 보일러를 설비하는 집들이 나타났다.
[공간 요소별 기능]
1. 안방
안방은 부엌과 붙어 있는 방으로, 남부 지역 등에서는 큰방 혹은 아랫방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안방’이라고 부른다. 이 방은 기능적인 면에서 중요한 공간이다. 중류층 이상 가옥의 경우에 안방에는 안주인인 시어머니만 거처하고 바깥주인인 시아버지는 건넌방[혹은 사랑방]에서 거처하는 예가 많다. 안방의 규모는 다른 실에 비해 큰데, 이것은 온 가족이 밥을 먹는 등 함께 모이는 공간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안방은 임종이 이루어진다는 상징성을 지니며,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도 쓰인다. 안방의 위쪽에는 윗방이 자리하는데, 서울 지방형 ㄱ자 집에는 없고, 부천과 같은 중부 지방형 ㄱ자 집에서만 나타난다. 이 윗방은 미혼 자녀의 생활 공간이나 세간을 넣어 두는 용도로 쓰인다. 안방과 윗방 사이에는 샛문이 있어 두 공간을 연결해 준다.
2. 건넌방
건넌방은 안방과 대청을 사이에 두고 배치되어 있다. 이 건넌방은 서울 지방형 ㄱ자 집과 중부 지방형 ㄱ자 집에 모두 있는 방으로, ㄱ자 집에서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 방은 자식 내외가 거처하는 공간으로 안방에 비해서 규모가 작다. ㄱ자 집에서 건넌방은 안방과 대청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안방에 거처하는 부모와 건넌방에서 생활하는 자식의 사생활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각 방의 독립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이 지역에서는 안방과 건넌방의 방문 위치를 엇갈리게 설치함으로써 각 실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사례가 많았다. 즉 방문을 열면서 안방과 건넌방에 거처하는 식구의 시선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계획하였다.
3. 대청
대청은 안방과 건넌방의 사이에 놓여 있는 공간으로 집 안의 가운데에 위치한다. 바닥이 나무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청’, ‘대청마루’ 또는 ‘마루’라고 부른다. 대청은 안방과 건넌방의 사이에 놓여 두 방을 자연스럽게 격리시켜 주고, 마당에서 내부인 방으로, 안방과 건넌방에서 상호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통로 역할을 한다. 또 수장 공간으로도 쓰이고, 겨울을 제외한 때에는 거처와 식사 공간으로 사용된다. 특히 여름에는 잠자리로도 이용된다. 이것은 밥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때면 방이 더워서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청의 규모는 1~2칸 가량인데, 이것은 가옥 규모나 경제적인 형편과 관계가 깊다.
4. 부엌
부엌은 배치나 평면 구성에 관계없이 항상 안방과 붙어 있는 공간으로,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부엌에는 한쪽에 찬광을 두고 전·후면에 출입문을 달아 안마당이나 장독대, 뒤뜰로 출입하기 쉽도록 하고 있다. 부엌은 아궁이에 불을 피워 안방과 윗방에 난방을 하고 밥을 짓는 취사 공간으로 쓰인다. 부뚜막에는 2~3개의 솥이 걸려 있어 물을 끓이고, 밥과 국을 하는 데 사용된다.
[부천의 고택]
부천시에는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 없어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고택이 적게나마 존재하고 있다. 먼저 고강동 고택은 경기도 부천시 수주로 66[고강동 315-2]에 있고,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미상이지만 밀양변씨 묘역 바로 옆에 있으며, 동쪽에 변씨 종택과 우물인 청수정이 있다. 건물은 ‘ㅁ’자 형태이고, 전체적인 원형은 유지되고 있다.
한편 작동에는 고택이 세 채 남아 있다. 이른바 작동 고택은 부천시 역곡로344번길 15[작동 126-1], 부천시 역곡로324번길 33[작동 126-13], 부천시 역곡로324번길 93-22[작동 127]에 거의 나란히 자리해 있다. 역곡로324번길 93-22의 고택은 400여 년이 다 되어 가는 건물이고, 본래 ‘왈(日)’자 형태의 건물이었으나 ‘ㅁ’자 형 주택이 되었다고 한다. 역곡로324번길 33의 고택은 음식점으로 운영되었기에 외관과 내부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청(淸) 도광제(道光帝) 14년 2월 19일이라는 글귀가 대들보에 남아 있어 1834년에 지어진 고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지어질 당시에는 궁실의 ‘산집’, 즉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는 집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역곡로344번길 15의 고택은 역시 음식점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상량문이 남아 있어 1903년 2월 18일에 축조된 집임을 알 수 있다. 평면은 ‘ㄴ’자 형의 집이다.
마지막으로 옥산로214번길 24[역곡1동 162-3]에 있는 고택과 역곡1동 165번지에 있는 고택이 있다. 옥산로214번길 24의 고택은 ‘ㅁ’자 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대들보에 써 있는 연대가 1949년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전의 대들보를 대체했다고 하여 그 시기가 더 올라갈 수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고택이다. 역곡1동 165번지의 고택은 ‘ㅁ⊃’자 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주민들에 의하면 100년 이상 된 건물로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서울과 인접한 부천 지역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생활상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사회적·경제적 여건이 변화하면서 전통 민가가 점차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와 연립주택·다세대주택·양옥이 신축되는 등 주거의 형태가 급격히 변하였다. 초가는 모두 사라졌고, 시멘트 기와지붕이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집이나 이런 형태의 집들도 부엌이나 안방 등을 보수·증축한 경우가 많아 건립 당시의 원형을 간직한 예는 거의 없다. 다만 고강동, 작동, 역곡동 등에 남아 있는 양반 가옥으로 추정되는 고택이 여전히 남아 있어 당시 부천에 거주한 사람들의 거주 양식과 형태를 조금이나마 추정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