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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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芝溶居住處記念標石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of Jeong Jiyong Dwelling Place |
이칭/별칭 | 정지용 살던 곳 기념푯돌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소사본2동 89-14[경인로 316]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유영자 |
성격 | 비|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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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연도 | 1993년 5월 30일 |
관련인물 | 정지용 |
높이 | 41㎝ |
길이 | 41㎝ |
면적 | 가로 30㎝|세로 41㎝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소사본2동 89-14[경인로 316] |
소유자 | 복사골문학회 |
[정의]
경기도 부천시 소사본2동 시인 정지용이 살던 집에 세운 기념표석.
[개설]
정지용(鄭芝溶)[1902~1950]은 현대시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시인이다. 정지용이 부천에 거주했던 사실은 이미 구자룡이 부천 천주교사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밝혔다. 정지용은 1943년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열세해지면서 내려진 소개령으로 부천에 3년 간 살았다고 한다. 당시 소사읍 소사리는 정지용이 태어나 자란 고향인 옥천과 같은 소박하고 인정미가 넘치는 복사골이었다.
정지용은 부천에서 시작(詩作) 대신 소사성당 창립에 전념하였다. 그는 이미 일본 유학 시절 방지거[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고 기도문 번역 작업에도 참여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왔다. 1946년 4월 5일 그의 열의에 힘입어 현재의 소명여자중·고등학교 도서관을 이용한 소사성당에서 첫 미사가 봉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1988년 7월 월북 작가에 대한 해금 조치가 발표된 후 『부천시민신문』 1989년 8월 12일자에 비로소 실릴 수 있었다.
[건립경위]
1993년 5월 30일 복사골문학회가 정지용이 살던 집 건물 벽면에 기념표석을 세웠다. 기념표석에는 “여기는 한국 현대시의 큰 별인 정지용 선생이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3년 동안 은거하면서 시심(詩心)을 키우던 곳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위치]
정지용 거주처 기념표석은 소사본2동 세종병원 후문, 소사 삼거리 못 미쳐 대로변 상가 건물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
[형태]
표석의 크기는 가로 41㎝, 세로 41㎝이다.
[현황]
정지용 거주처 기념표석은 대로변 상가 벽면에 부착되어 있기 때문에 상가에서 내놓은 상품에 가려져 있어 시민들의 눈에 띄기가 어렵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새겨진 글씨도 차츰 희미해져 갈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의의와 평가]
정지용은 현대시의 본령을 세운 큰 시인이지만,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특히 부천 지역 교회사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정지용 거주처 기념표석은 이 땅에서 시대의 고통을 짊어지고 간 한 고독한 시인의 발자취를 알려주는 기념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