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A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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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정지 |
“농사해서 먹을 땅도 너무 질어가지고 인근 마을은 진말이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오죽하면 남편 팔아서라도 장화는 신어야 한다는 말이 생겨났겠어요.”
소사구 깊은구지는 부천의 동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성주산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주산은 깊은구지와 솔안말, 구지말, 소새 지역 등을 품고 있는데 그 품이 넉넉해서 사람들의 살아온 역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깊은구지의 터주대감 박삼월 씨는 깊은구지의 위치와 지형 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깊은구지는 사방이 막혀 있어 매우 안락한 편이에요. 동쪽으로는 심곡도서관이 서쪽으로는 부천남부경찰서가 길을 막고 있어요. 그 중간쯤에서 든전물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물이 부천역하고 중앙로를 지나 홍천으로 합류하거든요. 말 그대로 깊은 골짜기를 이루는 마을이에요.”(박삼월, 심곡본동 마을노인)
그의 증언을 뒷받침하듯 1918년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발간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를 보면 이미 깊은구지 지명이 심곡(深谷)으로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사람들이 체감하는 마을은 단순히 ‘깊다’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겪어낸 마을은 땅이 질고 장마가 몹시 지는 ‘땅이 구지기 이를 데 없는’ 깊고 험준한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부천에서 벌써 40년이 넘게 살아온 신복순 할머니(80세, 심곡본동 마을노인)는 옛 일을 회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지금이야 뭐 심곡천 복개 공사도 됐다고 하고 도로[경인국도]두 뚫렸지만 그때만 해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어요. 장마철이 되기만 하면 좁은 도랑에 빗물이 넘쳐서 가옥도 잠기고 사람도 여럿 떠내려가고 그랬어요. 우리 집 황소도 떠내려가다가 잡아채서 끌어내기도 했거든요. 농사해서 먹을 땅도 너무 질어가지고 인근 마을은 진말이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오죽하면 남편 팔아서라도 장화는 신어야 한다는 말이 생겨났겠어요. 그래도 토질이 늘 축축하다보니 복숭아 농사는 잘 된 편이었죠.”(박삼월, 심곡본동 마을노인)
이처럼 깊은구지는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진흙탕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질퍽한 삶의 현장이었다.
아직도 신복순 할머니 기억에 생생한 사건은 1987년의 장마였다. 세상을 삼킬 듯이 비구름을 한껏 품은 태풍의 악령이 부천을 강타하면서 깊은구지 일대는 삽시간에 물바다를 이뤘다. 성주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시뻘건 물더미를 못이겨 저지대의 논밭과 주택들이 침수돼 파손되고 붕괴되기도 했다. 인근 원미산과 범박마루 계곡의 급류는 마을 앞에서 와류로 변했고 그 와류가 합쳐져서 한강 둔치를 삼킨 물이 가세했다.
지대가 낮고 평야를 이룬 인천 부평과 부천을 경계로 흐르는 굴포천은 이미 넘쳐 큰 강을 이루며 농가주택 수십 채가 지붕까지 찼다. 두려운 기세였다. 연일 신문은 부천 일대에 산사태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가옥 수십 채 침수, 상동평야 농작물 피해 수십억 원의 피해를 냈다고 보도했다. 저지대에 위치한 굴포천은 한강 수위보다 낮아 웬만한 강수량에도 역류하는 상습 침수 지역이었다. 한강과 이어진 굴포천은 상습 침수피해를 막기 위한 방수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이제는 다행히 침수피해는 걱정을 덜게 되었다.
벌써 굴포천 방수로 공사와 함께 경인운하 건설이 공론화 된 지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거양득의 실효성을 계산한 발상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무성한 숲을 이루었던 깊은구지의 환경은 적지 않게 파괴되었다. 현재 인공물이 성주산 산중턱까지 치고 올라와서 이제 옛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성주산을 가로질러서 간신히 도로가 뚫리는 것을 면한 몇몇 약수터는 아직도 부지런히 맑은 물을 쏟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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