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다문화 사랑 나눔터, 펄벅재단 부천지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A020302
지역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정지

소사 복숭아보다 부드럽던 펄 벅 여사의 박애정신

2006년 9월 28일 『한겨레신문』에 펄벅기념관 개관 기사가 실렸다.

1967년 6월 오후 서울 가회동 펄벅재단 한국지부 사무실. 75번째 생일을 앞둔 펄 벅 여사가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곁에는 유한양행 유일한 사장도 함께하고 있었다.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 산25[현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566-9]에 혼혈고아들을 위한 복지센터를 짓습니다. 재활과 교육시설은 물론, 의료시설, 식당, 과수원 등을 갖출 것입니다. 1만 평의 대지는 유일한 선생이 기증하셨습니다.”

펄 벅 여사의 선언이 있은 지 어언 오십 년. 최근 들어 혼혈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동남아 이주여성과 결혼하는 농촌 총각이 급증하고 그 2세들이 성장하면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혼혈인을 ‘다문화가정 2세’로 부르기 시작한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이후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 1세대들은 이런 호칭이 낯설기만 하다. 그들이 들어왔던 것은 ‘튀기’나 ‘잡종’이라는 험한 언어들뿐이었다. 현재 국내에 살고 있는 혼혈인 1세대는 5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많은 혼혈인 1세대가 미군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국내에 남은 혼혈인들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국내에 남게 된 혼혈인 1세대. 그들은 50, 60년간을 우리 사회의 편견에 둘러싸인 채 살아왔고 이제 노년을 맞이하고 있다.

소사희망원의 탄생지였던 부천에는 수 백여 명 이상의 혼혈인들이 존재했다. 그들 대부분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때우고 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에 지금까지 떳떳한 직장을 가져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태어나 혼혈인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의 사회, 제도에서 외면당해 왔다. 돈을 벌러 온 외국인 취급받는 한국 사회 속에서 그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해왔다. 사회적 편견에서 헤어 나오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피부색이나 머리색 등으로 놀림을 받았고 사람들로부터 불합리한 대우를 받은 경험이 부지기수였다.

펄 벅 여사는 그들을 위한 따뜻한 보금자리를 부천에 마련하였다. 복숭아나무 한 그루 없던 소사 산비탈에 그렇게 ‘희망원’이 들어섰다. 여사가 숨진 1973년 문을 닫기까지 2천여 명의 혼혈아들이 ‘희망원’을 거쳤다. 그리고 복숭아보다 부드럽던 펄 벅 여사의 박애정신이 살아있는 그 곳에 2006년 9월 펄벅기념관이 새 둥지를 틀고 그녀의 박애정신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