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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우물고사를 지내는 두레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B020103
지역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작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택희

“마을 우물고사를 지낼 때 마다 상쇠패들이 몰려와서 신명나게 노는 거야.”

작동은 예로부터 다른 마을보다 두레패가 유명했던 지역이다. 흥겹고 신명나는 한마당인 두레패들이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한마당 하면 잔치가 벌어지는 것 같이 시끌시끌했다. 지역원로이신 이창갑 할아버지(지역원로, 1941년생)는 비록 재주가 없어서 두레패를 하지 못하셨지만 그 흥겨웠던 순간만은 소중히 간직하고 계셨다.

“옛날에는 산골에 논과 밭이 있어서 상쇠놀이 한다고 했지. 지금 학교자리에 고사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계속 나왔어. 그런데 그 자리를 메우고 학교를 세웠어요. 그 후로 거기 가서 고사를 지낼 때마다 상쇠패들이 몰려와서 신명나게 노는 거야. 장쇠들이 깃대 메고 고리 붙이고 꽹과리를 치면서 집집마다 그 80호 되는 집을 다 돌아다녔어요. 우리 아버지가 그 상쇠들 중에서도 대장이었다고. 그걸 하면 정말 온 동네가 시끌시끌하지.”(이창갑, 작동 지역 원로, 1941년생) (조영제, 작동 지역 원로, 1943년생)

두레패는 마을 주민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 징, 장구, 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었다. 예전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축제의 장을 열고 신명나는 한마당을 벌였다. 하지만 지금은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동네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노애락이 마을의 일이었던 옛날에는 이웃 간에도 친동기처럼 아끼고 위로하는 법을 알았다. 마치 한 가족처럼 서로의 마음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정겨운 모습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운 추억으로만 남았다.

작동에서는 두레패를 중심으로 김을 매고, 김매기가 끝나면 우물제사를 지냈다. 작동에는 공동우물이 두 곳이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집안에 돈이 있어 개인우물을 팔 수 있는 몇몇 집을 제외하고는 공동우물을 만들어 다 같이 사용하였다. 하나는 식수로 이용하는 곳이었고 다른 하나는 농경과 관련된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후자에서 이루어진 것이 마을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우물고사이다.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전부터 우물고사가 내려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김매기가 대략 끝나는 음력 7월 초하룻날, 도살장에 가서 황소를 잡아다가 소머리를 우물 앞에 놓는다. 동네에서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이 축문을 읽고 술을 따르고 절을 한 다음, 축문 태우는 것으로 제사는 끝이 난다. 고사는 마을에서 나이 많은 사람만 하고 다른 사람은 우물가에 서서 구경만하고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물고사에서는 김매기, 즉 농경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후 농사의 풍년을 빌고 부락의 복을 기원했다.

풍년을 기원하는 우물고사가 열리던 우물은 그만큼 신성한 장소로 취급되었다. 1931년생인 민경흥 씨의 회고에 의하면 어렸을 때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역곡동으로 나가야 했는데 상여가 동네 우물 앞으로 가면 부정을 탄다고 해서 우물을 덮어야 했다고 한다. 또, 우물고사를 지내는 날은 가난하던 시절, 마을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날이 되기도 했다. 일 년 내내 고기 구경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우물고사나 지내야 쇠고기 구경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당에 들어선 농악대는 뒤안과 부엌을 휘돌아가면서 한바탕 신명을 내곤 하였다. ‘조선땅도 내 땅이고, 어쩌고…’, ‘이 구석 저 구석 어쩌고 저쩌고’하며 두레패는 멋들어지게 리듬을 타곤 했는데 그 때의 소리 좋은 어른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가셨다고 하니 애석하기 그지 없다. 다만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왔다.

“두레패는 전통적으로 내려왔었죠. 자꾸 가르쳐주니까요. 젊은 사람들하고 노인네들이 서로 배우고 가르쳐주고 하는데 나는 안 배웠어요. 아버지가 가르쳐 주려고 하는데 그까짓 것이 뭐냐 하면서 나는 도망다니면서 배우질 않았고, 집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했어요. 배우는 것을 나도 한번 저렇게 해보고 싶다고 하면서 배웠다구. 그렇게 배운 또래가 하나 있는데 기가 막히게 잘해요.”(이창갑, 작동 지역 원로, 1941년생)

이창갑 씨의 아버지는 상여매기는 소리가 일품이었고 유난히 꽹가리를 잘 치셨다고 한다. 동네체육대회 때 받은 동네 트로피와 함께 시골집 광에 놓여 있는 깨어진 꽹과리가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치던 바로 그 꽹과리였다는 것을 알고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 때문인지 어린 시절 대보름날에 마을 농악대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 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하신다.

주민들로 구성된 농악대는 징과 꽹과리 등을 치며 종일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축포를 터뜨리는 등 마을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도시의 규모가 커지면서 마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농악단은 사실상 해체된 곳이 많다. TV, 라디오가 귀하던 시절 마을 사람들의 여흥을 돋아주던 그들이었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농악대는 날이 추우나 더우나 누구네 경사스런 날에 생일, 환갑 등에 장사 때 빼놓고는 다 가서 꽹과리를 쳤어요. 그러고 공간이 없으면 마을에 모이는 데가 있었어요. 대개 말하자면은 주막식으로 술 파는 데가 있었어요. 그 집에서 술 한 잔 먹고 두들기면 마을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죠. 하여튼 3일 4일 거리로 꽹과리를 쳤다고 보면 되요. 가르치느라 치지, 술 한 잔 먹으면 치지. 그렇게 하던 동네인데 특히 재미있는 것은 환갑 때는 2, 3일씩 해요. 계속 손님들도 먼데서 많이 오고 그 사람들은 신이 나서 노는 재미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즐겁게 놀았어요.”(이창갑, 작동 지역 원로, 1941년생) (조영제, 작동 지역 원로, 1943년생)

일반적으로 농악대가 신명나는 연회를 베풀면 마을 사람들은 십시일반 모은 돈이나 곡식을 바치는데 이를 모아서 마을 사업을 위한 공동경비로 썼다. 두레에 대한 대가로 받은 품삯은 나눠 갖는 경우와 그 돈을 가지고 마을공동경비에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작동은 특이하게도 보수를 돈으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보수는 절대 안 받았어요. 동네에서 수고비를 곡식으로 줬어요. 곡식으로 주지 돈이라는 개념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꽹과리 치는 사람의 논은 부잣집이 땅을 내주어서 12마지기를 공동 농사를 지었어요. 그래, 공동농사를 해가지고 수확을 해서 그것으로 경비를 대고 그랬지요. 그 사람들이 농악 하는 날은 마을에서 밥해나가고 동네사람들 전체가 모이죠.”(이창갑, 작동 지역 원로, 1941년생) (조영제, 작동 지역 원로, 1943년생)

이처럼 두레패는 어떤 특별한 이유나 충분한 보상을 목적으로 행해지던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의미에서 시작한 하나의 놀이였다. 초저녁에 시작한 놀이판은 밤새 부락민들과 어울리다 보면 새벽 첫닭이 울 때서야 끝을 맺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처럼 마을 전체가 하나가 되는 소중한 소통의 장이었던 두레패의 신명나는 농악한마당이 다시금 되살아났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고 하신다. 신명나는 두레패 풍물 한마당 속에서 가족 같은 사랑과 정을 느끼며 살았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정보제공]

  • •  이창갑(작동 지역 원로, 1941년생)
  • •  조영제(작동 지역 원로, 1943년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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