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C020103 |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춘의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상원 |
도시인들을 끌어들여 신시가지를 형성한 춘의동
봄빛이 가득했던 겉저리에 공단 바람이 불어 닥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해방 후 춘의동 입구 마을인 겉저리와 양지마을 사이 평지에 삼보판지를 비롯한 유니온 백시멘트, 신흥정밀, 극광전기, 낫소 등의 공장들이 들어섰다.
춘의동의 공업화는 중앙로가 뚫리면서 가속화되었는데, 이 때문에 겉저리 주민들의 집이 헐려서 중동 쪽 논에다 다시 집을 짓고 이사를 해야 했다. 또한 겉저리는 1960년대 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작으로 커다란 변화의 시기를 맞이한다.
오랫동안 농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던 부천이 과감하게 변화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정책과 부천의 지리적 여건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경인고속도로와 경인철도가 지나는 교통 요충지라는 장점이 한몫했다. 춘의동은 부천에서도 부천역을 기점으로 경인고속도로 진입로로 연결되는 중앙로에 위치하고 있어 우선적으로 공업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했다. 부천역을 뒤로하고 경인고속도로 방향으로 똑바로 뻗어있는 중앙로는 바로 춘의동의 입구를 연결하는 주도로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7년 7월 경인고속도로가 완공되자 부천은 급격한 도시화를 경험하게 된다. 즉 서울과 인천에서 통근, 통학하거나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저렴한 땅값과 편리한 교통 여건을 갖춘 부천시에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출퇴근 약 한 시간 거리면 수도권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또한 낮은 지가(地價)와 용이한 공장설립 가능성은 중소기업체의 구미를 당겼다. 이러한 효율성 때문에 경인고속도로 주변의 신흥동, 성곡동, 성지동, 오정동, 춘의동 일대에 형성된 부천 북부지역은 경인공업의 중핵을 이루는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이 수천 개나 들어서 있다. 이들 생산업체는 1960~70년대 초에 입주한 업체들로, 대부분이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는 대기업의 계열공장의 성격을 띠고 있다.
경인고속도로 완공에 이어 1974년 경인철도가 설립되자 화물을 운송하는 시간이 크게 단축되면서, 외부인들을 끌어들여 신시가지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요컨대 부천 도시화에 있어서 도시공간구조를 결정하고 도시기능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기능을 한 것이 교통의 발달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부천은 경인철도와 경인고속도로가 들어서면서 위성도시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졌으나 춘의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경험한 것은 경인철도와 경인고속도로의 편리함보다는 고무신에 치덕치덕 흙덩이가 붙었다가 떨어져 나가는 울퉁불퉁한 흙길의 감촉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빗물에 젖어 벗겨지려는 신발을 용케 꿰신고서 질척이는 땅을 곧장 가로질러야 했다. 구자룡 시인은 『최은휴 연가-부천 예술의 선구자』에서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국도는 비만 오면 몹시 질척이고 울퉁불퉁해지는 흙길이었다. 철길 북쪽으로 마르보시 창고라고 했던 거대한 두 개의 목조건물 창고가 있었는데, 모양은 흡사 소래의 소금창고 같았다. 그 뒤로는 원미구 심곡리부터 내동 벌까지 복숭아밭과 논이 깔려 있었고, 오른쪽으로 나지막한 원미산이 엎드려 있었으며, 멀리 유니온 백시멘트 공장이 높은 굴뚝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이렇듯 소사는 한유한 시골마을이었다.”
작가는 온통 시커먼 목조 건물이 마치 흉가와 같이 허물어져가는 도시를 표현하는데 이 때 성주산에서 내려다보는 부천의 전경 묘사에서 엿볼 수 있는 ‘높은 굴뚝’, ‘하얀 연기’ 그리고 ‘백시멘트’는 춘의동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