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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의동 터줏대감이 읽는 부천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C030204
지역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춘의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상원

"공장이 들어서고 해도 딴 동네 같지 않았어요.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살기는 편했지."

이정웅 할아버지는 평생을 겉저리에서 살아오신 겉저리 토박이시다. 할아버지의 삶에는 겉저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 가족이 겉저리로 들어오신 것은 할아버지의 고조부 때 일이라고 한다.

“당아래는 한씨 집성촌이지만 겉저리에는 김씨, 서씨, 윤씨, 이씨 등 여러 씨족이 살았죠. 춘의동에서 제일 오래된 성씨가 옛날 노인네 말씀하시는 게, 장씨가 제일 먼저 와서 살았고, 고담에 한씨라고 그러더라구요. 근데 인제, 장씨는 서민이었거든요. 그래 족보가 없어가지구 언제서부터 살았는지는 모른대. 장씨가 오구 한씨네가 오구 고 다음에 우리가 왔는데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오시고 할아버지가 여기서 태어나셨고.”(이정웅, 겉저리 주민, 1939년생)

이정웅 할아버지의 집안은 고조부, 증조부, 조부님 대까지 3대 내리 외독자로 이어져 오셨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두형제분이 계셨는데, 그 중 한 분은 일찍 돌아가셔서 손이 끊어질까봐 마음고생이 많았다. 다행이 이정웅 할아버지의 조부님께서 건장한 삼형제를 두셔서 지금까지 겉저리에 대대로 살아오고 계신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겉저리에는 주로 참외 농사를 많이 했다. 벼 농사, 보리 농사에 참외 농사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6·25 전쟁 이후 미군부대가 부평에 들어오고, 그로 인해 인구가 늘어나게 되면서 농사를 지어 판매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고, 수익이 나는 채소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시절 겉저리에는 총 27가구가 있었던 것으로 이정웅 할아버지는 기억하신다.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집안일을 거들고 하는 것이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일과였다. 학교는 무척 멀어서 걸어서 원미구청까지 가야만 했다. 특히 할아버지의 형님 또래, 아버지 또래에는 인천 읍내까지 삼십 리 거리를 걸어서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집에 돈 있는 사람은 학교는 서울로 다니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여기 우리 위 형님들 또래에서는 아버지 또래에서는, 에 그게 뭐야, 보통학교라고 그랬지? 초등학교를 보통학교라고, 그거를 인천 읍내로 다니셨어요. 여기서 학교가 없어서, 인천 읍내면 무척 멀잖아요. 걸어서 다니는 거죠, 삼십 리였다고. 그 땐 아버지 또래 되신 분들이 초등학교를 다니곤 했어요. 장가들고 졸업을 맞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식하고 같이 학교 다니는 사람도 있고 그랬다고.”(이정웅, 겉저리 주민, 1939년생)

이정웅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군수까지 했던 분이라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6살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면서 할아버지는 집안일도 많이 거드셨다.

“여느 시골이나 다 마찬가지로 쪼끔 심부름 할 정도가 되면 소 풀이라도 뜯기면서 집안일을 도와야 했어요. 소는 주로 마당에 묶었는데 여름에는 송내동 뒷동산에 소나무가 빽빽했었거든요. 오죽하면 솔안말이라고 했겠어요. 여기는 뒷동산이 있어가지고 따뜻했어요. 당아래도 산 남쪽으로 동네가 있어서 따뜻하듯이 여기도 뒷동산이 있었거든요.”(이정웅, 겉저리 주민, 1939년생)

할아버지는 겉저리를 평화롭고 외부인에게 포용력이 있었던 마을로 기억하고 계신다.

“왜정 때서부터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여기 오셔서 사실 때부터 씨족 간에 싸움이 없었대요. …… 타동에서 들어와도 그 사람 쪼거나 그러는 게 없어, 당아래는 지금도그래 그 성질이 여태 있어. …… 타동에서 와서 살기가 힘들었어요. 씨족이 있고, 또 몇 씨족이 서로 세 다툼하고, 누구 네가 더 잘사네, 잘사는 사람이 세가 쎈 거지 뭐, 그런데 여긴 그게 없었어요. ……공장이 들어서고 해도 딴 동네 같지 않았어요.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살기는 편했지. 그런데 외부에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다보니까 오히려 그 사람들이 텃새를 해. 굴러 들어온 놈이 또 들어온 놈을 신고 받고 지랄을 하고, 허허허, 그래가지고 이 짜식아! 타동에 와서 너희들도 타관에 가서 그러면 좋겄냐? 우리도 그렇게 안하고 살았었는데, 너희들이 여기 와서 살면서 그 따우로 하면 되냐 하고 혼을 냈지. 그래 그 사람들이 터줏대감 노릇하고 허허! 거, 우리가 여기 와서 산 지가 몇 년인데 뭐 어쩌고 그랬지.”(이정웅, 겉저리 주민, 1939년생)

이정웅 할아버지의 마음속에 고향 겉저리는 내부인에게나 외부인에게나 항상 따뜻했던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한 포용력이 앞으로도 춘의동을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정보제공]

  • •  이정웅(겉저리 주민, 1939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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