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D02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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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웅규 |
복숭아 통조림 열풍이 불어 닥친 송내동
복숭아를 수확하는 작업은 매우 고된 일이다. 정직하고 꾸준한 관리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서 함께 모내기를 하고 벼를 베듯이 복숭아수확 또한 여러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 시기를 맞춰 과일을 수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장마라도 조금 길어지면 수확 적기를 놓쳐 일 년 간의 노력이 여지없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햇볕 한 번 비추지 않는 날이 지속되면 복숭아나무 뿌리는 흡수되는 수분을 배출해 내지 못한다. 그러면 과일은 쉽게 무르고 터져 버린다. 발 디딜 곳이 없이 떨어져 썩어가는 과일들만큼이나 농민의 속도 타 들어가는 건 당연지사다. 먹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나 조금이라도 상품가치가 떨어지면 본전도 찾기 어려운 것이 바로 복숭아재배였다.
수십 년 동안 과수 농사를 크게 지었다는 민동훈 씨는 오정초등학교 25회 동창들이 만난 자리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당시에는 집안이 나름대로 크게 복숭아밭을 하고 있었지만 소사복숭아의 유명세에 비해 크게 이윤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동시에 복숭아를 수확하는 일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힘들고 고생했던 기억이 많다고 한다.
“우리 집이 이곳에서 복숭아 농사를 가장 크게 지었지. 아마 천 그루 정도 됐을 거야. 근데 그 정도의 나무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부모님이 생각을 좁게 하셔서 참 많이 손해를 봤지. 왜 그러냐면 복숭아도 종이 여러 개 있어서 시기별로 딸 수 있도록 재배하면 조금이라도 이익을 남길 수가 있는데 그 때는 그런 생각을 안 하셔서 중생종 한 종만 심었거든. 그러니 복숭아 수확도 한 번에 몰아서 해야 하는 데다 일손마저 딸리니 수확하는 작업이 무척 어려운 일이었어.”(민동훈, 오정초등학교 25회 졸업생, 1947년생)
또한 복숭아는 과즙이 많아 보관이 어려웠다. 수년전부터 복숭아를 통조림으로 가공하여 판매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복숭아 재배 농민들의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이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에는 재배한 복숭아를 신선하게 출하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었고, 이 때문에 송내동 지역에서는 포도밭을 가지면 부자가 되고 복숭아밭을 가지면 부자가 못 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그도 그럴 것이 복숭아는 심고 재배하고 수확하는 과정마다 투자되는 비용이 매우 많은데 비해 결과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도 농사는 돈이 많이 되었는데 복숭아는 생각처럼 돈을 많이 벌지 못했어. 특히 장마 때만 되면 그냥 우두두 떨어지기 일쑤였다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복숭아 재배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게 되었고 예전보다 많이 규모가 축소된 거지. 또 농약을 많이 치는 과일 중 하나가 복숭아인데 농약에 중독되어 고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아무튼 큰돈도 안 되면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니까 서서히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더라고.”(민동훈, 오정초등학교 25회 졸업생, 1947년생)
손해가 극심할 때는 밭의 70% 정도는 비워두고 나머지 밭에만 복숭아를 심어서 수확할 때도 많았다고 하는데 빈자리에는 전부 고구마를 심었다고 한다. 복숭아 농사보다 고구마의 수익성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숭아의 수익성이 낮은 것을 보완하기 위해 점차 고구마는 물론 포도 같은 다른 과실도 함께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소사복숭아는 마을 전체를 대표하는 특산물이었지만 과수원을 운영하는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적인 고통이 많이 뒤따랐다. 민동훈 씨는 만약 그 때 무른 복숭아를 이용해 통조림을 만드는 기술을 조금 더 일찍 배워뒀더라면 크게 성공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한다.
복숭아 재배에 대한 아쉬움은 채 스무 살이 되기도 전부터 복숭아 재배를 시작한 한경택 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1950년도부터 재배를 시작했으니 살아온 대부분을 복숭아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경택 씨가 태어나고 자란 솔안말 동네는 거의 전부가 복숭아나무가 뒤덮은 복숭아밭이었다고 한다. 그는 직접 복숭아 농사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판매·경매까지 도맡아서 했는데 장소에 따라 그 방식이 조금씩 달랐다.
일단 복숭아 수확을 하면 부평 깡시장이나 부천 깡시장으로 물건을 옮겨 갔는데 부평 깡시장은 경매사가 경매를 해서 복숭아를 팔았고, 부천역 근처 깡시장은 위탁상회라고 해서 위탁판매를 했다.
그러면 서울이나 인천에 있는 상인들이 와서 복숭아를 구매하기도 하고 다시 그것을 소매로 받아서 먹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매까지 가면 파는 사람은 거의 돈을 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요즘은 직접 농가로 찾아와서 사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당시엔 전부 우마차(소마차) 같은 것을 이용해서 시장으로 보내서 팔았기 때문이다.
“소마차 바퀴가 나무여서 자갈 있는 곳을 가면 딸그닥 딸그닥 거려요. 그러면 조금 지나서 딴 것들은 다 부딪쳐서 물러지거든. 그러니 상품성이 많이 떨어지게 되었지. 그래서 그런 것들은 팔지 못하고 다시 가져와서 소사동의 통조림 공장으로 다 넘겨줬어요. 직접 먹을 수는 없으니 가공해서 통조림으로 해서 먹으려고. 이득이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공장에 들어가면 그래도 먹을 수는 있었으니까 서로 좋은 거지.”(한경택, 복숭아 과수원 주인, 1942년생)
그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즐겨먹던 복숭아는 지금처럼 크고 인물 좋은 복숭아도 있었지만 솜털이 많고 볼품없이 작은 까칠 복숭아가 많았기 때문에 상품성이 크게 떨어져 통조림공장으로 많이 보냈다고 한다. 논과 밭 모서리에 아무렇게나 자라난 야생종은 지금의 살구만 했지만 모든 게 자연 그대로였다. 봄이 되면 저절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복숭아. 재배가 까다롭지만 버릴 수도 없어 벌레가 먹은 복숭아를 먹으면 예뻐진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던 그 농부들의 땀이 매우 값지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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