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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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浩亨 |
영어공식명칭 | Jang Hohye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범성 |
출생 시기/일시 | 1893년 6월 7일 - 장호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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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16일 - 장호형 북면 만세시위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10월 20일 - 장호형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장호형 애족장 서훈 |
출생지 | 장호형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597 |
거주|이주지 | 장호형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597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북면 만세시위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출신 독립운동가.
[가계]
장호형(張浩亨)[1893~1950]의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아버지는 장한석(張漢錫)으로 1893년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597에서 태어났다. 동생은 함께 북면 만세시위에 참여한 장호리(張浩利)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서울을 시작으로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가평 지역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가평 지역 만세시위에 불을 당긴 것은 이규봉이었다. 이규봉은 고종 인산일을 맞아 서울에 상경하였다가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서울에 사는 제자인 정한교(鄭漢敎)와 신태연(申泰鍊), 민영순(閔泳純)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뒤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숨겨 가평으로 돌아왔다.
이규봉은 이윤석(李胤錫), 정흥교(鄭興敎)와 만세시위에 대해 의논한 뒤, 주민들 약 20여명을 불러 모아 서울의 상황을 전하고 가평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함께 결의하였다. 거사일은 3월 15일로 정해졌다. 장호형 또한 스승 이규봉과 뜻을 함께하여 만세시위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때 장기영(張基英), 정성교(鄭聖敎), 이만석(李萬錫), 정재명(鄭在明), 이병찬(李炳贊) 등이 이에 합류하기로 하였으며, 만세시위 계획을 북면 내 각 동리의 주민들에게 알렸다. 이들은 부녀자들과 함께 태극기 1,800여 개와 비밀통문 500여 매를 제작하였다. 3월 14일 밤, 정기복(鄭基福), 정천수(鄭天洙), 최인화의 3인은 북면 일대에서 비밀통문을 배부하였고, 이윤석 등 다른 인물들도 각 동리를 찾아가며 만세시위 참여를 요청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5일 북면 주민들은 북면의 성황당에 집결하여 먼저 만세를 부르고, 다시 북면사무소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다. 장호형은 동생 장호리를 비롯한 주도 인물들과 함께 북면 주민들을 이끌며 만세를 불렀고, 함께한 주민의 수는 수백명에 이르렀다. 북면 주민들은 가평군청이 있는 가평 읍내로 몰려가 태극기를 들고 또 다시 만세를 불렀다. 김정호(金定鎬), 최기홍(崔基弘), 장귀남(張貴男), 김창현(金昌鉉) 등 가평 읍내의 주민들도 참여하여 인원은 더욱 늘어났다. 이들은 가평군청과 면사무소, 보통학교와 우편국 등 각 관광서 및 주요건물을 돌며 만세를 외치다가 저녁에 되어서야 해산하였다.
3월 15일 저녁 일본 경찰은 이규봉·이윤석 부자와 최기선(崔基善)·최인화(崔仁和) 부자, 최종화(崔宗和), 최용화(崔容和) 등을 체포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장기영(張基英), 정성교(鄭聖敎) 등은 체포당한 만세시위 주도인물을 되찾으러 가자고 주민들에게 말하였다. 이에 주민 200여명과 함께 3월 16일 성황당에 모였는데, 장호형은 동생과 함께 당고개에서 헌병분견소를 향해 이동하다 헌병을 만났다. 장호형은 장기영, 정성교, 이교성(李敎星) 등 선두 무리와 함께 일본 경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격렬하게 저항하다 피체되었다. 이로 인해 장호형은 동생 장호리와 함께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상훈과 추모]
장호형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