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326
한자 熊峙戰鬪
영어공식명칭 Ungchi Battle
이칭/별칭 곰티재 전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7월 7일연표보기 - 웅치전투 발생
종결 시기/일시 1592년 7월 8일연표보기 - 웅치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웅치전투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웅치전투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이광|이정란|황진|이복남|정담|황박|변응정 외

[정의]

1592년 7월 8일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일대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

[개설]

웅치는 전라북도 진안과 전라북도 전주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웅치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서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여러 개 노선이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했을 때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두목마을에서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로 넘어가는 덕봉길이 가장 유력하다.

1592년 4월 13일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1592년 5월 3일에 한양을 점령하고, 1592년 6월 14일에 평양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비록 한양을 점령했으나 전쟁이 장기화 되는 조짐을 보이자 임진강에서 작전회의를 갖고 조선을 분할통치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1592년 5월부터 전라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592년 5월 8일경 조선에 출정한 일본군들은 조선 8도를 분할해서 담당했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전라도 침공을 담당하게 된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1592년 5월 25일에 임진강에서 남하해 전라도로 향했다. 1592년 6월 23일에 일본군은 금산을 점령하고. 1592년 6월 말경에는 용담과 진안을 점령하고 웅치를 통해 전주를 공격하고자 했다. 당시 전라도에서는 전라감사 이광(李洸)을 중심으로 해서 관군이 수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광은 전라도내 각지의 관군을 동원해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배치하고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한 전라도의 많은 지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과정에서 일본군이 전쟁의 장기화 가능성에 대응해 식량의 확보와 후방의 안정을 위해서 전라도 지역을 공격하고자 했다.

[경과]

일본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전주로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감사 이광은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해당하는 웅치이치의 주요 지점에 방어사 곽영(郭嶸), 김제군수 정담(鄭湛), 동복현감 황진(黃進),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을 나누어 배치하고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한 전주부성에는 남원의 군사를 비롯한 남도의 여러 고을에서 동원된 군사들을 배치하고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이외에도 광주목사 권율 등은 남원, 장수, 임실 등지에서 방어하고 있었다. 황진은 웅치에 있다가 적정을 살피기 위해서 진안 방면으로 나가 일본군 선봉부대를 격파하기도 했다. 1592년 7월 2일경에 일본군이 남원으로 침입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 이광은 황진을 남원 방어를 위해 파견했다. 1592년 7월 5일에 일본군이 진안을 거쳐 웅치로 공격해 오자 이광은 남원으로 파견했던 황진을 다시 올라오도록 했다. 당시 전주부윤이던 권수(權燧)가 갑자기 병사하자, 이정란(李廷鸞)을 수성장으로 임명하고 전주 수비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이광은 여러 고을의 병사를 거느리고 남고산성으로 들어가 주둔했다. 웅치에서는 1진에 의병장 황박(黃璞)이, 2진은 나주판관 이복남이, 웅치 정상의 3진은 김제군수 정담이 방어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한산도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긴 1592년 7월 8일에 일본군은 웅치로 공격해 왔다. 일부 기록에는 일본군이 1592년 7월 7일에도 웅치 방면으로 공격했다고도 한다. 1592년 7월 8일 새벽부터 본격적인 공격이 이루어져 저녁 무렵에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해 황박과 이복남 등은 안덕원으로 후퇴했다. 해남현감 변응정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그러나 정담은 아군들의 후퇴를 돕기 위해서 웅치 정상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정담 외에도 종사관 이봉, 강운 등 많은 관군과 의병들이 전사했다. 웅치를 점령한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죽은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어 그 위에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워놓고 전주성으로 향했다고 한다.

[결과]

웅치전투를 1592년 7월 7일과 1592년 7월 8일에 있었던 웅치에서만 전투로 평가하면 패배한 전투가 된다. 그러나 1592년 7월 9일경에 있었던 안덕원전투와 이어지며, 웅치에서 후퇴한 군인들과 황진 등이 안덕원에서 승리하자 일본군은 다시 웅치를 넘어 금산으로 후퇴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본다면 웅치전투는 조선 관군과 의병이 승리한 전투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의 육군은 초기에는 계속해서 패배했으나, 전라도로 침입하려던 일본군에 맞서 싸워 승리한 육군 최초 승리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웅치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주를 방어할 수 있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금산까지 왔던 일본군이 물러나게 되어 임진왜란 기간 동안 전라도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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