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328
한자 梨峙戰鬪
영어공식명칭 the battle of Ichi
이칭/별칭 배티재 싸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7월 10일연표보기 - 이치전투 발생
종결 시기/일시 1592년 9월 17일연표보기 - 이치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이치전투 -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이치전투 -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권율|황진|황박|변응정

[정의]

1592년 7월 10일 이후부터 1592년 9월 17일까지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일대에서 왜군과 싸워 이긴 전투.

[개설]

이치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진산면은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진산현이었다. 진산에서 이치를 통과해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운주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지역으로 갈 수 있고, 남서쪽으로는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을 통과해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과 전라북도 전주시로 이동할 수 있는 주요 통로이다. 1592년 4월 13일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1592년 5월 3일에 한양을 점령하고, 1592년 6월 14일에 평양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비록 한양을 점령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는 조짐을 보이자, 임진강에서 작전회의를 갖고 조선을 분할통치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1592년 5월부터 전라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592년 5월 8일경 조선에 출정한 일본군들은 조선 8도를 분할, 담당했고, 여기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전라도 침공을 담당하게 되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1592년 5월 25일에 임진강에서 남하해 전라도로 향했다. 1592년 6월 23일에 일본군은 금산 지역을 점령하고. 1592년 6월 말경에는 용담과 진안을 점령하고 웅치를 통해 전주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1592년 7월 8일부터 1592년 7월 10일까지 이어진 웅치안덕원전투에서 패하고 금산으로 철수했다. 한편 진산에 주둔하던 고경명은 1592년 7월 9일에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1592년 7월 10일에 전사했다. 이후 안덕원에서 패하고 금산으로 물러난 일본군과 금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진산을 비롯한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역사적 배경]

1592년에 진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주변을 약탈하고, 더 나아가 전주 또는 충청도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치를 공격했다.

[경과]

1592년 7월 9일부터 1592년 7월 10일 사이에 안덕원전투에서 승리한 황진(黃進)과 의병장 황박(黃璞) 등은 이치로 이동했다. 그리고 남원 방면에서 방어에 주력하던 권율(權慄)도 이치로 이동해 방어에 참여했다. 오희문(吳希文)이 지은 『쇄미록(瑣尾錄)』에는 1592년 8월 17일에 황진이 진산의 이현[이치]에서 일본군을 물리쳤고, 1592년 8월 18일에는 조헌과 영규가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패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치전투가 정확하게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관련 사료를 종합해 보면 권율 등은 이치의 정상에서 총괄 지휘하고 있었으며, 황진 등은 진산 방면으로 나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이 황진부대를 공격하자 황진은 공시억, 위대기 등과 함께 용전분투하며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때 황진은 다리에 총을 맞아 피가 신발에 흘러들었지만 쉬지 않고 활을 쏘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막바지에 황진이 이마에 조총을 맞고 기절하자 이치 수비군이 수세에 몰렸으나, 공시억, 위대기 등이 힘껏 싸워 일본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백사 이항복이 쓴 권율의 「유사」에 의하면 황진이 쓰러지자 일본군이 성채로 뛰어들었으며, 권율이 칼을 뽑아 직접 싸움을 독려해서 승리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웅치전투안덕원전투에 참여했던 황박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의 피해도 있었다.

[결과]

일본군이 이치에서 황진과 권율을 공격했으나, 패한 일본군은 진산으로 물러났다가 금산으로 돌아갔으며, 1592년 9월 17일에 경상도로 철수했다.

[의의와 평가]

백사 이항복은 이치전투로 인해 일본군이 다시 호남을 엿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를 근본으로 국가의 안전이 보장됨으로써 물자와 군량의 공급이 끊기거나 모자라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