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343
한자 義兵運動
영어공식명칭 Movement of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혜영

[정의]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북도 완주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의병 항쟁.

[개설]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라북도 지역에는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은 지역적인 경계를 넘나들면서 활약했는데 전라북도 완주 지역에는 이규홍 의병대를 비롯한 여러 의병들의 항쟁이 있었다.

[완주 지역의 의병과 주요 활동]

전라북도 완주군 지역에서 의병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은 이규홍, 유지명이다. 이규홍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구국운동에 참여하겠다고 결심하고 박이환, 문형모 등 동지를 규합했다. 1906년 4월 거의(擧義)[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떨치고 일어나 나라를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함]를 도모하고 있는 최익현에게 찾아가서 자기의 의지를 피력하고 최익현이 주도하는 대부분 동참하기로 약속하였다. 이규홍은 고산[현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익산의 포수를 모으는 일을 맡기로 하고 귀가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규홍의 아버지 이기영은 집에 보유한 양곡을 팔아 군자금으로 쓰도록 했다. 이규홍은 박이환, 문형모 등을 각처에 파송해서 산 포수를 불러 모으고 지사들을 규합해 합류하려 했으나 최익현의 부대가 해산함으로써 참여할 수 없었다.

이규홍은 1907년 군대 강제 해산 이후 각처에서 봉기하자 다시 거의 뜻을 세우고 준비를 했다. 먼저 아버지 이기영으로부터 가산을 모두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고 가산을 모두 팔아 몇만 원의 자금을 마련했다. 이규홍이 병졸을 수습하고 군기를 준비하자 소문을 들은 지사들이 각처에서 모여들었다. 이규홍이 쓴 『오하일기』에 의하면, 이때 모집된 군병 257명, 사들인 무기는 양총이 100여 자루, 한총이 200여 자루, 연환이 20여 말, 화약이 10여 말이었다고 한다. 전투가 개시될 무렵에는 의병이 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규홍 의병대가 출병할 당시 조직을 살펴보면, 의병장 이규홍, 부장 박이환, 참모장 문형모, 참모 송치옥, 김봉우, 안종문, 최관호, 김호, 김한정, 이상근 등이었다. 이규홍 의병대는 비봉, 화산 지대에 병기 제작소까지 설치했다. 1907년 11월 15일 고산군 가금리 가경재[현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화월리 가경재]에서 이규홍 의병대는 처음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일본군 29명이 사살되고 아군이 21명 전사하는 격전이었다. 1907년 12월 5일부터는 진안, 장수, 용담 등 산간지로 주둔지를 옮기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1908년 2월 초순 일본군이 각 지역의 의병 가족을 붙들어가거나 포살[잡아 죽임]한다는 소문이 의병 진중에 퍼지고, 자수하는 의병의 죄를 사면해 준다는 방이 붙게 되자 전의를 잃게 되었다. 더구나 호남 의병장들의 전사, 체포 소식이 전해지고 전사자가 늘어나면서 이규홍 의병대도 10여 명에 불과하자 결국 거병한 지 5개월만인 1908년 4월 군대를 해산했다.

이규홍 의병대에 속해 있던 유지명 등은 군대 해산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1908년 12월 의병대 자체의 정화를 위해 의병을 빙자하고 비행을 저지르는 윤병오를 처단했으며, 친일파인 배형춘을 잡아 죽임으로써 부일배의 경각심을 촉구했다. 1909년 5월에는 연산[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모촌[현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모촌리]에서 일본군 3명을 사살했다. 1909년 9월에는 고산 읍내[현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에서 일본 기병 3명을 격살했다. 유지명은 1907년 9월 스스로 삼남의병대장이라 칭하고 의병 수백 명을 모집했다. 그리고 총 수백 정을 확보하고 각 부서를 정했다. 또한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의 부호들에게 통고하여 확보했다. 그렇게 군량 징발 준비를 마친 후, 때로는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전라도 용담군[현 전라북도 진안군]·고산군[현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충청도 은진군[현 충청남도 논산시] 등지에서 활약했다. 1907년 9월 용담군 건무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비롯해 여러 차례 용담군·고산군·은진군 일대에서 일본군 보병·기병·헌병 등과 접전, 전과를 올렸다. 1908년 10월 3일 밤 유지명은 부하 정성일(丁成一)·김치삼(金致三) 등 수십 명을 이끌고 심상의, 노원섭 양 의병대와 합세해 금산읍[현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을 습격,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한 후 일본인 3명을 죽이고 9명에게 상처를 입혔다. 또한 우편취급소와 세무소, 일본인 가옥 9개 동을 소각하고 양총 2정과 탄환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12월 24일 윤병오(尹炳五)라는 사람이 의병으로 속이고 겁탈·강간을 일삼아 의병의 명예를 실추시키므로 타일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군기를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시키기 위해서 부하 유치복(柳致福)으로 하여금 총살하도록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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