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의 고장, 완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1364
한자 韓紙-故場, 完州
영어공식명칭 The home of the Hanji, Wanju
분야 문화유산/무형 유산,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동희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의 한지 생산 역사와 유적.

[개설]

전라북도 완주군은 조선시대 최고의 한지로 평가받던 전주 한지의 주 생산지이다. 전라북도 완주군은 전라북도 전주시의 외곽지역으로 1935년에 전주군에서 분리되었다. 완주 한지의 중심지는 소양면상관면이라고 할 수 있고, 구이면에서도 많은 한지를 떴으며, 이외에 동상면화산면 등에서도 한지를 많이 떴다. 1944년 한지제조업에 종사하는 호구 수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라북도가 1,772호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고, 전라북도 내에서 완주군이 475호로 가장 많았다. 전라북도는 한지 생산을 대표하는 곳이고, 그 중심이 완주군이었다.

[완주 한지의 역사성]

전라북도 완주군은 조선시대 전라도의 수부인 전주부의 외곽지역과 고산현이 합쳐진 행정구역이다. 고산현은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의 북부지역으로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전라북도를 1부 14군으로 개편하면서 전주군에 통합되었다. 즉, 1935년에 전주군의 중심인 전주읍을 전주부로 승격시키고, 전주읍을 제외한 전주군의 외곽지역을 완주군으로 분리하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종이로 꼽는 전주 한지의 주생산지는 곧 지금의 완주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1. 고려시대의 완주 한지

우리나라에 종이와 제지기술이 전래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제지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통일신라를 거친 고려시대로, 중국인들이 제일의 종이로 선호하는 고려지는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고려시대에 닥나무 재배와 한지 생산은 국가산업으로 발전되었다. 이때 전라북도 완주군과 전라북도 지역에서도 상당량의 닥나무를 재배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조선시대에 전라도가 닥나무의 주요 산지였으므로 고려시대에도 그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 정가신이 전주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종이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다는 기사는 곧 고려시대에 이미 전라북도 완주군이 한지의 주요 산지였음을 시사해준다. 고려말 목은 이색도 전주 사람 이백유의 부친을 천거하는 시에서 “완산엔 종이가 있어 넓고 또한 길거니[完山有紙闊且長]”라고 하여 전라북도 전주시가 종이의 고장임을 피력하고 예찬하였다.

2. 조선시대의 완주 한지

조선시대의 완주 지역은 고려시대에 이어 전주부에 속했다. 중종 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주부의 토산물로 종이가 등재되어 있으며, 그 옆에 ‘상품(上品)’이라고 부기되어 있다. 전주 한지는 조선 말까지 변함없이 특산물로 자리하였다. 즉, 15세기의 『세종실록지리지』, 16세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 18세기 말에 간행된 『호남읍지』, 19세기 후반의 『호남읍지』에 한결같이 전주의 특산물로 한지가 등재되어 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실려 있는, 지장(紙匠) 수를 군현별로 구분해 보면 가장 많은 지장을 두고 있는 곳이 전라북도 전주시와 전라북도 남원시로 각각 23명의 지장이 있다. 경상도는 가장 많은 지장을 둔 곳이 경상남도 밀양시로 17명이다. 전라북도 전주시와 전라북도 남원시에 못 미치는 수이다. 충청도는 가장 많은 지장이 배치된 곳이 충청북도 청주시, 충청남도 공주시, 충청남도 홍성군[홍주: 충청남도 홍성군의 고려·조선시대 지명]으로 각각 6명이다. 강원도는 2명, 황해도는 4명이 가장 많은 군현이다.

19세기 「전주부고지도」에 보면, 전라감영 안에 인출방(印出房)[책을 인쇄하던 곳]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지소(紙所)[한지를 만들던 곳]를 두었으며, 전주부성 밖으로는 전주천 너머 도토리골과 남원 가는 길 신리 쪽에 외지소가 있었다. 신리 지소는 현재의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으로, 신원[신리역] 못 미쳐 물가에 있다. 전라북도 전주시,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북도 순창군 등지에 지호(紙戶)[종이를 잘게 찢어 물에 불린 뒤 물과 섞어 일정한 틀에 부어 넣거나 덧붙여 만드는 것]가 촌락을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고산현에는 20개 지역을 모은 도회소(都會所)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1900년 제정 러시아가 한반도에 대한 세력 확장을 위해 조선의 제반 문물을 조사 정리한 정책자료집 『한국지』[원명 КОРЕИ]에, 우리 종이 한지의 쓰임새가 무한하고, 제지 기술이 중국을 능가하며, 가장 질 좋은 한지와 절대 다수의 한지가 전라도에서 생산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전라도는 한지의 본산이었으며 그 중심이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이다. 경향신문, 1966년 7월 18일 자의 기사에 나오는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마을 어느 지공의 이야기는 완주 한지의 뿌리 깊은 역사성을 대변하고 있다. “옛날엔 이 송광마을에 담이 돌려지고 외인 출입이 엄금되었으며, 진공품을 만들던 지장(紙匠)은 대단한 대접을 받았다”라는 것이다.

3.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의 완주 한지

전라북도 완주군 한지의 전통은 일제강점기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때 발행된 『전라북도의 특산물』이란 책에 보면, 전라북도의 특산물이라 하여 조선지를 첫 페이지에 싣고 있다. 당시 전북 지역에서 생산된 한지 수량은 29,784괴에 금액은 771,007원이었다. 『전라북도의 특산물』에서 완주 한지에 대해서, ‘전북에서 생산된 한지가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전 조선만이 아니라 만주에까지 출하되었다. 그중에서도 전라북도 완주군의 대롱지와 장판지가 유명하였다’라고 하였다. 1944년 평양상공회의소에서 발간한 『조선지』에 실린 한지제조업에 종사하는 호수를 보면, 전국적으로 총 한지제조업 종사 호수는 4,310호이며, 이를 도별로 구분해 보면, 전라북도가 1,772호로 가장 많다. 이는 전라북도가 그만큼 한지 생산을 대표하는 곳이었음을 의미한다.

전라북도 내 군별 분포를 보면, 전라북도 완주군이 가장 많아 475호가 한지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 두 번째가 전라북도 고창군 311호, 세 번째가 전라북도 진안군 303호, 네 번째가 전라북도 임실군 290호, 다섯 번째가 전라북도 남원시 143호, 여섯 번째가 전라북도 순창군 107호, 일곱 번째가 전라북도 무주군 91호이다. 1936년 조사된 한지 생산량을 보면, 전라북도가 23,268괴에 금액은 713,589원이었다. 생산량으로 하면 경상북도가 전라북도보다 다소 많아서 24,839괴인데, 금액은 경상북도가 657,071원으로 전라북도보다 적다. 금액으로는 전라북도가 최고이다. 도의 면적과 금액을 놓고 볼 때 전라북도가 곧 일제강점기 한지 생산을 대표하는 곳이었음을 말해준다. 한국산업은행 전주지점장 조인정 씨는 해방 전의 한지 산업에 대해, “한지가 전라북도 내 산업 중 미곡의 차위(次位)를 점하는 중요 산물”이었다고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전라북도 완주군은 전주 한지의 전통을 이어 우리 종이 한지의 대표적 생산지로 자리하였으며, 이러한 전통은 광복 이후로도 이어졌다. 1957년 생산량을 보면 전라북도 완주군이 7,570괴로 제일 많고, 그다음이 전라북도 임실군으로 5,220괴이다. 같은 해의 한지 공장 수와 종업원 수도 전라북도 완주군이 74개 공장에 1,625명으로 가장 많고, 전라북도 임실군이 66개 공장에 746명으로 두 번째이다.

[완주 한지 유적 유물]

2011년에 전라북도 완주군 한지 유적 조사를 통하여 총 51개의 지소를 찾았다. 이들 지소 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적어도 일제강점기 전후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지소들이었다. 면별로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23개소,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11개소,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7개소,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6개소,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3개소,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1개소이다. 조사된 현존 유물은 닥돌이 가장 많아 13점, 도침방아 4점, 철판 1점 등이다. 지소 분포와 함께 지장들의 구술을 통해 볼 때,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상관면이 완주군 한지 생산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은 장판지를 대표하는 곳이고,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은 창호지를 대표하는 곳이었다. 전라북도 완주군의 구이면, 동상면, 화산면 등은 창호지를 주로 생산하였다. 특히 소양 장판지는 전라도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거의 독보적인 종이였다. 영남에서도 장판지를 생산하였지만, 그 품질이 소양 장판지를 따라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소양 장판지는 조선 최고의 장판지였으며 이런 전통은 1980년대 전후까지도 이어졌다.

1. 소양면 소재지 동양산업조합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우체국과 농협 자리에 한지 산업조합인 동양산업조합이 있었다. 이 일원에서 생산된 한지들은 모두 이 동양산업조합을 거쳐야 했다. 조합 관사 건물이 우체국 뒤편에 최근까지 남아 있었으나 2009년에 철거되었다. 우체국 서편으로 일제강점기에 지은 붉은 벽돌의 ‘ㄱ’자 창고건물 일부 벽면이 관사 철거 후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전라북도의 특산물』에 동양산업조합을 포함해 7개면 7개 조합이 생산단체로 등재되어 있고, 이 조합들을 거친 종이를 전라북도 전주시 팔달정에 소재한 조선지업주식회사가 지정판매자로 총판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동양산업조합을 제외한 나머지 6개 조합은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갈담산업조합,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순창산업조합,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면 고창산업조합,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면 진안산업조합,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면 산내산업조합,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면 무주산업조합 등이다.

2. 소양면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所陽面)은 완주 한지 생산의 시원 같은 곳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조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송광사의 하급 스님들이 직접 종이를 뜨고 또 동네 사람들에게도 이를 가르쳐 관수용을 납품했다”고 한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의 송광골짜기[송광·마수, 해월리, 용연] 일원, 대승마을 일원, 반곡마을 일원 등에서 한지를 떴는데,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는 송광골짜기는 장판지를 떴으며, 대승마을과 반곡마을 등은 문종이를 주로 떴다. 송광사가 자리한 대흥리 송광마을 골짜기의 오래된 지소는 웃지소, 가운데지소, 아랫지소, 새지소 등이다. 이들 지소 중 가장 오래된 지소가 웃지소이다. 웃지소는 송광사 앞 하천 건너에 있으며, 지소 앞 도로 건너에는 송광1리 경로회관이 있다. 본래는 송광사하고 웃지소가 붙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큰물이 지면서 물길이 지금처럼 송광사와 웃지소 사이로 바뀌었다. 원암 가물택이 지소에는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형태의 줄방이 남아 있었다. 한지 뜨는 직공들의 숙소로 2011년 조사 때까지도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대승마을에는 ‘대승한지마을’ 한지테마촌이 조성되어 있다. 철거된 동양산업조합 관사 샹량은 대승마을에 재현된 조합 관사건물에 옮겨져 있다.

3. 상관면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上關面)소양면과 함께 완주군의 대표적 한지 생산지이다. 소양면이 장판지를 주로 생산했다면, 상관면은 창호지를 주로 생산하였다. 조선 후기인 19세기 「전주부지도」에 상관 신원역 근처에 외지소가 나타나 있다.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전라북도 임실군으로 가는 길에 슬치 만마관 못 미쳐 신원역이 있고, 이 역 못 미쳐서 좌편으로 지소가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외지소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당시 상관 일원에서 많은 한지가 생산되었음을 말해 준다. 2011년 조사에서 확인된 상관면의 지소는 신리의 백산바우·새터·신흥·어두리·월암 등과, 죽림리의 정지골·공덕·공기골·서당[반월]·사옥·북재 등 11곳이다. 하천을 따라 신리에서 죽림리 일원까지 지소가 분포했던 것이다. 이 중 가장 크게 운영된 지소는 백산바우 지소였으며, 정지골 지소, 새터 지소, 서당리 지소 등도 규모가 큰 지소였다.

4. 구이면·동상면·화산면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九耳面)소양면상관면 못지않게 완주군의 대표적인 한지 생산지로 창호지를 주로 떴다. 안덕리 원안덕마을구이면에서 가장 많은 한지를 떴던 것으로 보이며, 인접한 안덕리 장파마을항가리 원항가마을에도 지소가 있었다. 원안덕마을[구안덕 포함] 네 곳, 장파마을원항가마을 각각 한 곳의 지소를 확인하였다.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東上面)은 1950년 한국전쟁 무렵까지만 놓고 본다면 소양면, 상관면 등에 못지않게 대표적인 종이 생산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후에도 작은 규모로 그 맥을 이어갔지만, 소양면이나 상관면보다 일찍 한지의 맥이 끊겼다. 창호지를 주로 떴으며, 사봉리 밤티마을, 수만리 지향동과 학동 등에 지소터가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도 밤티마을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한지의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북도 전주시 흑석골 오동호 씨를 비롯한 오씨 집안도 그렇고 대승마을 홍순필 씨의 집안도 밤티마을 출신들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華山面) 또한 창호지를 많이 생산하였던 곳이다. 그 중심은 운곡리 돈의마을로 6개의 지소가 있었으며, 그 아래 마을인 판교에 지소 1곳이 있었다. 비봉면에는 대치리 선동마을[새터]에 지소 1곳이 있었는데, 이 마을은 바로 화산면의 판교마을 아래에 있다. 면의 경계만 달리하고 있지, 실제로는 돈의마을, 판교마을, 선동마을은 인접한 마을들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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