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057 |
---|---|
한자 | 權秉悳 |
영어음역 | Gwon Byeongdeo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박걸순 |
[정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경력]
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손병희(孫秉熙)[1861~1922]와 함께 6만 여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전제관장(典制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中央敎會審計院長)·감사원장(監査院長)·선도사(宣道師) 등 계속 천도교의 주요 직임을 역임했다.
[활동사항]
1919년 2월 손병희로부터 3·1운동의 계획을 듣고 민족대표로 참가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에는 최린(崔麟) 등 천도교측 동지들과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서명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泰華館)에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을 선언한 후 피체되어 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저술]
『조선총사(朝鮮總史)』·『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궁중비사(宮中秘史)』 등 역사에 관한 다수의 저술을 남겼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