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청주문화대전 > 청주의 마을 이야기 > 비하동 동양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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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명은 흥덕구 강서 1동 24통이고, 법정명은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飛下洞) 동양촌(東陽村)이다. 비하동은 시의 서부에 있으며, 동쪽은 복대동, 서쪽은 지동동, 남쪽은 강서동, 북쪽은 향정동과 접해 있다. 본래 청주군(淸州郡) 서강내일하면(西江內一下面) 지역으로 피아골, 피하골 또는 비하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동(道洞) 동양리(東陽里)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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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촌은 부모산(父母山)[232m]의 동쪽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청주-조치원간 도로가 나 있으며, 마을을 서쪽으로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이전에는 일대가 모두 농경지였으나, 최근에 하복대지구가 개발되어 급속히 도시화되어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상가가 들어서고 있다. 동양촌 북쪽 도로가에 아래사양재마을이 있고, 아래사양재 북서쪽 골짜기에는 윗사양재마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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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촌은 벼농사를 위주로 생계를 유지하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일제시대에는 부업으로 동네 주민 전체가 인조진주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유리를 달구어 만든 인조진주를 마을의 중간 상인을 통해 조치원 장에 내다 팔아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전형적인 농촌 생활상을 보이던 동양촌은 청주의 도시화와 함께 급격히 변하였다. 그 주요인은 도로의 개설과 대단위 아파트단지의 유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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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춘무삼대창의사적비(朴春茂三代倡義事蹟碑)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운 박춘무(朴春茂)[1544~1611], 이괄의 난·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박동명(朴東命)[1576~1636] 및 손자 박홍규(朴弘遠) 3대의 공적을 기려 1992년 세운 비석이다. 동양촌마을 앞 원모단(遠慕壇)에서 북동쪽으로 100m 지점에 위치한다. 비제(碑題)는 ‘민양공화천당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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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촌의 서낭제는 동제가 아니라 개인 신앙이다. 서낭은 한갓골고개와 용골고개에 있었는데, 그 중 한갓골 서낭을 더 많이 위했다. 한갓골 서낭은 소나무 앞에 돌로 원형 탑을 쌓아 올린 형태로 개인이 고사를 지냈었다고 하며 현재 소멸되었다. 용골고개 서낭은 최근에 소멸되었는데, 10여 년 전만 해도 서낭에 왼새끼에 종이를 꼬아 꽂은 금줄이 쳐 있었다고 한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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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모두 조산원이나 산부인과에서 출산이 이뤄지지만 예전에는 산파를 불러 집에서 낳았다. 산모의 진통이 시작되면 산파는 방의 자리를 걷고, 미리 추려놓은 짚을 깔고 그 위에 재문지를 깔았다. 아이를 낳으면 탯줄은 산모와 아이 쪽으로 모두 한 뼘씩 남기고 잘랐다. 자른 탯줄과 분비물은 왕겨 속에 넣고 마당에서 삼불을 놓아 태웠는데 이 삼불은 사흘 정도 탔다. 삼불이 다 타 재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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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윷놀이는 정월대보름 전에 주로 행하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실내 실외 어디서든 누구나 가능한 놀이이다. 윷은 주로 밤나무로 만들었고, 가시나무나 소나무로도 만들었다. 밤나무윷은 크기가 다른 윷에 비해 작아 한 손에 들어가 예전에 많이 사용했다고 하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예전에는 동네에 초상이 났을 때 호상(好喪)인 경우 상가(喪家) 마당에서도 윷놀이를 했다. 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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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기재된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래 부모산은 아양산, 악양산(岳陽山) 등으로 불렸다. 임진왜란 때 박춘무(朴春茂)[1544~1611]가 복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고 아양산 마저 탈환하여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박춘무에게 패전했던 왜병이 아양산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산 주위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자 그 안에 갇힌 의병들은 보름이 지나자 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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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촌의 교통은 일제시대에 개설되어 확장된 청주-조치원간 도로, 청주역으로 통하는 도로, 청주시 외곽도로 등과 접해 있어 편한 편이다. 동양촌은 전통적으로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 위주의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도로의 개통과 택지개발로 인한 도시화로 유입 인구가 증가하여 2,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