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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기원전후로부터 기원후 300년까지의 시기를 지칭하는 시대구분의 명칭. 한국고고학에서 사용되는 시대구분 명칭으로, 1970년대 초에 생겨났는데 초기철기시대에 뒤이은 시기를 말한다. 원삼국시대는 종래 고고학에서 김해(金海)시대, 웅천기(熊川期), 또는 초기철기시대 등으로 불려왔고, 역사학에서의 삼한시대, 군장국가, 성읍국가 등이 이에 해당되지만, 삼국시대의 원초기(原初期),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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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 이후로 사용되었던 철로 만들어진 도구의 총칭. 철기는 제조기술상으로 보면 주조품(鑄造品)과 단조품(鍛造品)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청주지역에 철기가 등장하는 시점은 지금까지 확인된 유적을 통해 보면 기원후 3세기대부터이며, 아직까지는 그 이전시기의 철기가 출토된 유적은 확인되고 있지 않다. 청주지역에서 발견된 철기의 종류는 그 용도에 따라 농공구(農工具)·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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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던 시대의 문화. 한국의 철기문화는 중국 전국시대의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으며, 철기의 자체적인 생산은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여진다. 철기생산의 본격화 및 현지화, 제조기술의 발전은 다른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쳐 새로운 토기의 출현, 생산력의 증대와 같은 결과를 낳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통합이 가속화되어 국가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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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고대국가 중의 하나. 서기 전후 무렵에 성립되어 660년 당에게 멸망할 때까지 한반도 서남부에 존재했던 나라로 마한(馬韓) 50여개 소국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이 성장 발전하여 이룩한 나라이다. 백제는 한강유역에 자리를 잡은 마한 소국의 하나로서 나라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건국설화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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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발견된 백제의 산성, 고분, 주거 유적. 청주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처음 보이는데, 63년(백제 다루왕 36, 신라 탈해이사금 7)에 백제가 청주로 비정되는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진출하여 신라와의 화의를 요청하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후 청주 인근 지역을 두고 백제와 신라는 오랜 공방전을 벌이게 되면서, 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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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고려초 사회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지방세력. 신라말 진골귀족 내부 정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독자적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지방으로 낙향한 진골귀족이나 6두품 계통, 지방의 토착세력인 촌주, 해상 세력, 지방군사 세력에서 기원하고 있다. 이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스스로 장군이나 성주를 자처하였다. 호족은 대토지를 지배하고 있고, 사병(私兵)을 중심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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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촌락문서」에 기재된 각 촌락 별 호구의 규모를 나타낸 기준 수치. 「신라촌락문서」의 기재양식은 첫머리에 촌락의 둘레에 이어 공연(孔烟)과 계연(計烟)의 수, 9등호제에 의한 각 등급의 연(烟)의 수의 순서로 되어있다. 공연과 계연, 그리고 각 등급의 연의 수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는데, 계연은 각 등급연에 기본수를 설정하여 등급연의 수와 곱한 다음 이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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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후반 고구려(高句麗)의 남하(南下)로 인한 청주 주변의 상황. 청주를 둘러싼 삼국간의 항쟁은 427년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 천도(遷都)로부터 시작된다. 청주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는 4세기대의 전성기를 지나면서 남하하는 고구려의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고구려는 북쪽 이민족과의 항쟁에 주력하면서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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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촌락문서」에서 호(戶)를 나타내는 단위. 「신라촌락문서」에서는 호(戶)라는 용어를 대신하여 연(烟)을 사용하고 있는데, 문서에 기재된 연에는 공연(孔烟), 계연(計烟), 등급연(等級烟), 삼년간중수좌내연(三年間中收坐內烟), 회거연(廻去烟) 등이 있다. 각 촌의 첫머리에 합공연(合孔烟) 얼마로 표기되어 있는 수는 각 촌에 거주하는 등급연과 3년 안에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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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토지의 종류. 「신라촌락문서」에서 토지는 답(畓)과 전(田)으로 나누어 먼저 합계를 기록한 다음 지목별의 토지 면적을 기재하고 있는데, 관모전답(官謨田畓)이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다. 각 촌락의 관모전답의 면적과 그 비율을 살펴보면 사해점촌은 답 102.024결 중 관모답이 4결, 살하지촌은 답 63.649결 중 관모답이 3.667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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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과 연기군 전의지역으로 추측되는 삼국 항쟁기의 전투지. 금현성(金峴城)은 『삼국사기(三國史記)』권 제37 잡지 제6 유명미상지분(有名未詳之分)에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26 백제본기 성왕 28년 3월, 권19 고구려본기 양원왕 6년 3월,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1년 3월, 권44 이사부)에 의하면 550년 백제 장군 달기(達己)가 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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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옛 지명.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551년(신라 진흥왕 12) 3월 진흥왕(眞興王)은 순행(巡行) 중에 낭성(娘城)에 이르러 우륵(于勒)[500?~562?]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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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토지의 종류.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4개의 촌락 중에서 사해점촌(沙害漸村)에만 내시령답이라는 이름의 토지가 보인다. 사해점촌의 논[畓]은 모두 10만2024결(結)인데, 이 중 내시령답(內視令畓)은 4결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내시령답은 내시령이라는 관원에게 그 직무의 대가로 주어진 토지로 보이는데, 내시령이라는 직명은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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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방형의 무덤구덩이 안에 시신을 안치한 나무널을 묻은 철기시대의 무덤. 널무덤(木棺墓)이란 장방형 혹은 말각장방형의 무덤구덩이를 파고 따로 통나무나 판재로 만든 나무널(木棺)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다음 그 널을 무덤구덩이 안에 묻은 철기시대의 무덤이다. 기존에는 움무덤(土壙墓)로 지칭되어 왔다. 청주지역에서의 널무덤은 청주시 송절동 유적·봉명동 유적·신봉동 유적·가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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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엽 삼국이 다투던 요충지. 550년(신라 진흥왕 11) 정월에 신라의 이사부(異斯夫)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으며, 649년(신라 선덕왕 3) 8월에 백제가 석토성(石吐城) 등 7성을 함락시켰을 때 김유신(金庾信)이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이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도살성(道薩城)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37 잡지 제6 유명미상지분(有名未詳之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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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싸울 때 쓰는 도구의 총칭. 철제 무기류의 발달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인을 이루고 있다. 무기류는 그 특징에 따라 크게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로 나뉜다. 청주지역에서 확인된 3~5세기 대의 무기류는 모두 철로 만든 철제품(鐵製品)으로 대부분 공격용 무기이다. 이에 반하여 방어용 무기는 공격용 무기에 비하여 확인된 예가 극히 드물며, 대체로 4세기 후반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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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부의 하나로 왕경과 소경에 있었던 행정구역의 명칭. 사량부(沙梁部)는 사훼부(沙喙部) 또는 사탁부(沙𠸌部·沙𣵠部) 등으로 쓰기도 한다. 여기서 량(梁), 탁(𠸌·𣵠), 훼(喙)는 모두 도(道) 또는 독(督)으로 읽혔으며, '돌'로 발음한다. 그 뜻은 아마도 도랑을 낀 지역, 즉 들판의 뜻으로 여겨진다. 사량부는 梁部(=喙部·𠸌部)에서 분화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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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촌. 「신라촌락문서」에는 4개의 촌명이 보이는데 그 중 그 이름이 확실한 것은 사해점촌(沙害漸村)과 살하지촌(薩下知村) 둘 뿐이다. 사해점촌의 마을의 규모는 둘레 5,725보(步)이고, 호구수는 11호(戶)에 147명이다. 가축으로는 말이 25마리, 소가 22마리이고, 논은 102결(結) 2부(負) 4속(束), 밭(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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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를 둘러싼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각축장. 살수(薩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37잡지 제6 유명미상지분(有名未詳之分)에 보인다. 494년(신라 소지마립간 16, 고구려 문자왕 3, 백제 동성왕 16) 가을 7월에 신라 장군 실죽(實竹) 등이 고구려와 ‘살수(薩水)의 들판’에서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犬牙城)으로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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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촌. 「신라촌락문서」에는 4개의 촌명이 보이는데 그 중 그 이름이 확실한 것은 사해점촌(沙害漸村)과 살하지촌(薩下知村) 둘 뿐이다. 살하지촌의 마을의 규모는 둘레 12,830보(步)로 4개 마을 중에 가장 크다. 호(戶)는 15호에 인구는 125명이고, 논은 63결 64부 9속, 밭은 119결 5부 8속이다. 가축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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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를 중심으로 한 삼국간의 항쟁. 교통의 요충지인 청주를 빼앗기 위한 고구려, 백제, 신라간의 항쟁으로 청주지역을 최종적으로 획득한 신라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427년(장수왕 15) 고구려의 평양 천도와 함께 남쪽으로의 진출을 강화하자,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를 방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백제는 개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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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년(신문왕 5) 충청북도 청주 지방에 설치된 신라시대 5소경(五小京)의 하나 신라는 삼국통일 후 전국을 9주(州)와 5소경(小京)으로 재조직하였다.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밑에 군(郡)·현(縣)을 두었으며, 주에는 총관(摠官:후에 都督으로 개칭), 군에는 군수(郡守), 현에는 현령(縣令)을 두었다. 또한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는 소경을 두었다. 소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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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중요한 지역에 두었던 지방 특별 행정구역. 신라의 소경제 채용은 고구려의 3경제(三京制)의 설치와 운용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고, 그 직접적인 설치 계기는 6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체제정비와 수도의 도시계획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즉 지증왕(智證王, 500~514)대에 지방 행정조직인 주와 군제가 실시되고, 중앙과 변경지역에 이르는 관도와 우역이 정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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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엽 신라의 청주 진출과 운영. 신라는 청주 및 금강 중상류 지역을 장악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신라는 5세기 후반부터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금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6세기 중엽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획득하여 고구려 세력을 몰아낸 신라는 다시 백제를 압박하여 금강 중상류역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때 청주지역도 신라의 영역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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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오다이사(東大寺)의 쇼소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2매의 통일신라시대의 문서 「신라장적(新羅帳籍)」, 「신라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 1933년 일본 도오다이사(東大寺)의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13매의 경질(經帙) 가운데 파손된 『화엄경론(華嚴經論)』의 포갑(包匣)을 수리할 때 그 내부의 포심(布心)에 덧붙인 휴지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이 문서는 촬영 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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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토지의 종류.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4개의 촌락 중에서 사해점촌(沙害漸村)에만 촌주위답이라는 지목의 토지가 보인다. 사해점촌의 전답은 논[畓]이 102결(結) 2부(負) 4속(束)인데, 이 중 관모답(官謨畓)과 내시령답(內視令畓)이 각각 4결이고, 그 나머지 연(烟)이 받은 것이 94결 2부 4속이 된다. 그런데 그 중에 촌주(村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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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屍身)을 묻기 위해 널길을 통해 무덤방[石室]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돌로 쌓아 만든 무덤. 돌방무덤이란 밀폐된 덧널(槨)이 아니라 출입이 가능한 돌로 만든 방(室)을 의미하며, 돌방무덤을 쓴 동기는 일회성 매장(埋葬)이 아닌 추가장(追加葬)을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추가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덤방을 만들고 생전에 실내를 출입하듯 무덤방을 드나들 수 있도록 무덤 한쪽 측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