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784
한자 高句麗南下
영어음역 Goguryeo Namha
영어의미역 Southward Movement of Gogurye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집필자 강민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연도/일시 5세기 후반
발생(시작)장소 청주 일원

[정의]

5세기 후반 고구려(高句麗)의 남하(南下)로 인한 청주 주변의 상황.

[역사적 배경]

청주를 둘러싼 삼국간의 항쟁은 427년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 천도(遷都)로부터 시작된다. 청주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는 4세기대의 전성기를 지나면서 남하하는 고구려의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목적]

고구려는 북쪽 이민족과의 항쟁에 주력하면서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복수와 남쪽 견제를 위해 백제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발단]

특히 광개토왕(廣開土王)은 대륙뿐만 아니라 신라(新羅)와 가야(加耶)에 대한 직접적인 내정 간섭을 통해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 보이는 신라·가야 영토 내에서의 군사활동은 두 나라를 ‘신민(臣民)’이라 부를 정도였다. 또한 에 대한 끊임없는 침입을 통해 백제의 50여 성(城)을 빼앗고 백제왕의 항복을 받기에 이르렀다.

[경과]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長壽王)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된 백제와 신라는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 475년 한성백제(漢城百濟)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결과]

고구려는 이때 금강유역(錦江流域)까지 도달해 백제의 피난 수도인 웅진(熊津)을 위협하였으나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패퇴해 한강 이북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백제와 고구려는 한강을 경계로 하여 대치하게 되었다. 최근 경기(京畿) 일대에서 확인된 백제의 산성(山城)은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백제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5세기 후반의 정세는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삼국간의 관계는 각 나라가 국운을 건 대립의 중심에 있었다. 한성백제를 멸망시킨 고구려의 선두가 금강에 이르러 백제의 수도를 위협하게 되었고, 군사적 거점 마련을 위해 대전 월평산성과 청원 남성골산성을 쌓았다. 충주의 중원고구려비와 단양 온달산성은 고구려의 남하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남한강 유역뿐만 아니라 금강 유역에 이르는 충청북도 일대가 모두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된 사실을 보여준다.

금강 유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다음 기록에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475년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 이듬해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의 백성을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대두산성은 478년 좌평(佐平) 해구(解仇)와 은솔(恩率) 연신(燕信)이 반란을 일으킨 곳으로, 해구는 죽임을 당하고 연신은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479년 백제가 대두성을 두곡(斗谷)으로 옮긴 것은 대두산성·대두성으로 불리던 지역이 백제의 영역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충남 연기 지역으로 추정되는 대두산성을 배경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고구려에 항복한 연신의 존재와 대두성의 이동을 통해 현재의 충청북도 청주·청원, 충청남도 연기 일대가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494년 ‘살수지원(薩水之原)’ 전투는 청주지역을 차지한 고구려가 신라·백제를 상대로 전역을 넓혀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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