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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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濟臣 |
영어음역 | Yi Jes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몽응(夢應), 호는 청강(淸江)이다. 이시보(李時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공달(李公達)이고, 아버지는 병마사 이문성(李文誠)이며, 어머니는 부령도호부사 우예손(禹禮孫)의 딸 능달(能達)이다. 영의정 상진(尙震)의 손자사위이다. 부인은 상붕남(尙鵬南)의 딸 목천(木川)상씨이다.
[활동사항]
7세 때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남명 조식(曹植)이 한번 보고서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17세 때 용문산으로 조욱(趙昱)을 찾아가 학업을 닦고,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한 후 156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처음 벼슬맡은 직으로 승문원권지정자에 보임되었고, 예문관검열·성균관전적·형조정랑·공조정랑·호조정랑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선조 때 예조정랑으로 명종실록의 편수관으로 참여했고, 사헌부감찰·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 대간직을 지냈다. 사은사의 종사관으로 선발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1년(선조 4) 울산군수로 나가 아전들의 탐학을 근절시키고, 백성들의 불편을 없애는 데 힘썼다. 1573년에 이율곡의 후임으로 청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펼쳤다. 그의 아들 이명준(李命俊)[1572~1630]이 광해군 때 서원현감을, 그의 5대손 이징하가 숙종 때 청주목사로 부임한 인연도 함께 있다. 1578년 진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펴서 공이 많았는데, 이 때 토호들의 모함으로 병부(兵符)를 잃고 벼슬을 사임, 향리에 은거하였다.
1581년 강계부사로 다시 등용되고, 이어서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84년 여진족 이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 경원부가 함락되자, 패전의 책임으로 의주 인산진(麟山鎭)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저술]
『청강집(淸江集)』, 『청강소설(淸江小說)』, 『진성잡기(鎭城雜記)』 등이 있다.
[작품]
시문에 능하고 글씨는 행서·초서·전서·예서에 모두 뛰어나 경기도 과천의 상붕남묘비(尙鵬南墓碑), 이현령인손묘갈(李縣令仁孫墓碣) 등이 그의 글씨이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평간(平簡)이며 1585년 경연관 이우직(李友直)의 특청으로 신원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청백리에 책록되었다.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과 경기도 양평 양근의 미원서원(迷原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