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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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魯重 |
영어음역 | Park Noju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양수 |
[정의]
구한말의 청주지역 학자.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성위(聖威), 호는 창암(滄庵)이다. 사주면 복대리(지금의 흥덕구 복대동)의 독산에서 박익동(朴翼東)의 아들로 태어나 그 뒤 신성동로 이사하였다.
[생애]
네 살 때에 이미 천자문을 읽고, 일곱 살에 『효경(孝經)』, 『논어(論語)』를 외우는 재질이 있었다. 어머니 상을 당하기에 앞서 17살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려서 효행이 높았다. 현량(賢良)의 천거를 입어 시표(詩表) 두 시험에 장원하여 선비들이 칭찬하였다.
그 뒤 공주 강학루(講學樓)에 살며 학업에 힘쓰더니,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나자 향리에 돌아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문장도학(文章道學)도 출중했으나, 때를 잘못 만나 포부를 펴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끝내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1945년 82세에 죽으니, 그를 아끼고 숭앙하던 유림제자와 일족이 다같이 슬퍼하였다.
[활동사항]
서원의 유사(有司)와 문묘(文廟)의 직원(直員)을 지냈다. 대한제국의 멸망하고 늙은 후에는 천리 바다를 건너 섬으로 들어가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스승으로 배우며 심성론을 닦고, 한편 문인 제자를 모아 강학하며 일제에 항거할 것을 강조하였다.
[저술]
『창암집(滄庵集)』 5권이 전한다.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학천 뒷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