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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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公升 |
영어음역 | Yi Gongseu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이미숙 |
[정의]
고려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달부(達夫)이며, 호는 추월재(秋月齋)이다. 태조 때 공신 이희능(李希能)의 6대손이자 이겸의(李謙宜)의 5세손이다. 이공승의 아들은 이춘로(李椿老)와 이계장(李桂長)이 있다.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을 잘 지었고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直翰林)을 거쳐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다. 1148년(의종 2)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임명되어 사신으로 금나라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이때 사신으로 가는 자는 관하(管下)의 군에서 한 사람이 은 한 근씩을 받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공승은 한푼도 받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그 뒤에 여러 관직을 거쳐 우승선 좌간의대부(右承宣左諫議大夫)를 거쳐 지어사대사(知御使臺事)가 되었다. 이때 의종(毅宗)을 어릴 적부터 보좌해 오던 정함(鄭諴)을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로 제수코자 하였으나, 이공승은 이를 반대하여 고신장(告身狀)에 서명하지 않고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또 의종이 관북궁(館北宮)에 굴실(窟室)과 축대를 만들어 금과 옥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환관 궁녀들과 더불어 주연을 베풀고 이공승과 김양, 이담 등을 불러 시를 읊도록 하였을 때 공명과 부귀의 극치는 다 이 꽃 아래서 마시는 석잔 술자리에 모였다.라고 작시하여 왕의 잘못된 행실에 대해 간언하기도 하였다.
그 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서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동지추밀원사 지상서이부사(同知樞密院事 知尙書吏部事)를 역임하였다. 1168년 나이가 들어 물러나기를 청하니 참지정사 판공부사(參知政事 判工部事)로 승진하여 사임하게 하였다.
그는 관직을 사임한 후 정원에다 초가를 지으며, 연못을 파고 화초를 심어 내객과 더불어 시와 술로써 한가히 지냈는데, 1173년(명종 3)에 이의방(李義方)이 문신들을 학살할 때 문생(門生) 문극겸(文克謙)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 1175년에 왕이 그의 오랜 덕을 중히 여겨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제수하였고, 1183년에 나이 85세로 죽었다.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제향]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에 있는데, 영조 2년(1726)에 건립되어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공승은 수염이 아름답고 얼굴이 늙어 보이지 않았으며, 성품이 고결하였으므로 살림은 잘 돌보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왕이라 할지라도 간언을 함으로서 관직이 좌천되기도 하였으며, 남의 잘못을 보면 참지 못하고 그 즉시 욕설로 대하여 그 사람을 부끄럽게 하였다. 이공수(李公遂)는 당대에 보기 드문 청렴하고 강직한 청백리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