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066 |
---|---|
한자 | 李軌 |
영어음역 | Yi Gw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이미숙 |
[정의]
고려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공제(公濟)이며, 아명은 이재(李載)이다. 아버지는 이유적(李攸績)으로 예부시랑(禮部侍郞)의 관직을 지냈다.
[활동사항]
청주 사람으로 선종 때 소부주부(少府主簿)가 되어 왕의 명령으로 송나라에 보내는 표문(表文)을 교정하였다. 그런데 송나라 연호를 써야 할 데다 그만 요(遼)의 대안(大安) 연호를 써서 송이 그 표문을 돌려보내 왔으므로 이 사건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파면되기도 하였다.
1101년(숙종 6)에는 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서,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대각국사(大覺國師)가 공목관(孔目官) 이복(李復)에게 부탁하여 금종(金鐘)을 헌납할 것을 청원하게 한 일이 있었다. 사신이 귀국한 후 형부에서 이복을 탄핵하여 처벌하고 또 이궤도 그런 내막을 알면서 금지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 책임을 물어 파면을 당하였다.
그러나 예종 때는 추밀원사(樞密院使), 정당문학(政堂文學), 호부상서 판예부사(戶部尙書 判禮部事), 수국사(修國史)를 역임하고, 수사공 좌복야 참지정사(守司空 左僕射 參知政事)에 오르기도 하였다.
또한 예종이 일찍이 편년통재(編年通載)를 보고, 홍관(洪灌)에게 삼한이래 사적(史蹟)을 선집(選集)하여 바칠 것을 명령하면서, 허지기(許之奇), 박승중(朴昇中), 김부일(金富佾), 윤해(尹諧) 등과 함께 음양설(陰陽說)에 관한 서적에 대하여 논평을 적게 하여 집필을 하기도 하였다. 그 후 병으로 1122년 7월에 죽었다.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다.
[의의와 평가]
국가의 중대한 공문인 표문을 맡아서 교정하고,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한 논평을 집필할 정도로글을 잘 썼던 재능이 있고 뛰어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