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2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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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復興 |
영어음역 | Gyeong Bokheu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병희 |
[정의]
고려 후기의 재상.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우대언(右代言) 경사만(慶斯萬)의 아들이다. 아들에 경보(慶補), 경진(慶臻), 경의(慶儀)가 있다.
[활동사항]
1354년 군부판서(軍簿判書)로 등용되었으며, 판추밀원사, 참지문하정사를 역임하였다. 지정사상의(知政事商議)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경성수축을 논의하자 그가 정세운, 유숙과 더불어 “병란과 기근으로 인하여 만일 축성하면 백성이 견디지 못할 것이다”고 하여 반대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1356년(공민왕 5) 권신 기철 등을 포살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참지중서성사(參知中書省事)로 옮겨졌다. 1359년 홍건적이 침입함에 서북면부원수로 군대 천여 명을 거느리고 안주에 주둔하였는데, 적을 두려워하여 감히 싸우지 못하여 서경이 함락되었다. 왕이 노하여 군법으로 논죄하고자 하였으나 평소의 치적으로 면죄되었다.
이듬해 서경이 수복되고 적이 퇴거함에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이 되었으며, 이어 평장사(平章事),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되었다. 1361년 홍건적이 다시 침입하자 왕을 호종하여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난을 피하였다.
1363년 최유(崔濡)가 원에 있으면서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원병 1만으로 침입하였는데, 이때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이순, 최영, 안우경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좌시중에 임명하였다. 개선할 때 예의로써 맞았으며 백관으로 하여금 국청사(國淸寺) 남교(南郊)에서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1365년 수시중(守侍中)이 되었으나 신돈(辛旽)이 권세를 부리고 있었으므로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신돈의 배척을 받아 파직되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67년 연택 등과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어 홍주로 유배당하였다. 이때 가족은 모두 종이 되고 그 가산은 몰수당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소환되어 다시 좌시중 제조정방에 올라 전선(銓選)을 맡았다. 공민왕(恭愍王)이 시해됨에 경복흥(慶復興)[?~1380]은 종실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이인임(李仁任)이 신우를 세웠다.
1375년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 이인임과 지윤은 그를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정도전(鄭道傳)은 이에 반발하였다. 이때 경복흥은 이인임과 같은 입장에 서서 반대하는 정도전을 회진현(會津縣)으로 귀양보냈다.
왕이 서연(書筵)을 게을리하는 것을 시정하려고 하였으며, 전선(인사행정)의 문란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1377년(우왕 3) 수성도통사로서 개성 근처까지 침범한 왜구에 대비하였다.
경복흥은 청렴과 결백한 행동을 가지고, 지윤, 이인임의 탐욕을 증오하였으나 제지하지 못할 줄 알고 날마다 술에 취하는 것으로 일삼았다. 1180년 이인임은 그의 청직함을 꺼려하여 “술을 좋아하고 정사를 돌보지 아니한다”고 참소해 청주에 유배되었다. 경복흥은 유배지 청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렬(貞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