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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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象賢 |
영어음역 | Song Sangh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재학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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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 송상인(宋象仁)|송상원(宋象元) |
시호 | 충렬(忠烈) |
추증/추서 | 이조판서|좌찬성 |
상훈 | 정려 |
생년 | 1551년 |
몰년 | 1592년 |
본관 | 여산(礪山) |
자 | 덕구(德求) |
호 | 천곡(泉谷)|산목거사(山木居士) |
아버지 | 송복흥(宋復興) |
어머니 | 안동김씨(安東金氏) |
아내 | 성주이씨(星州李氏)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자는 덕구(德求)이며, 호는 천곡(泉谷)이다. 아버지는 평강, 용안 등의 현감을 지낸 송복흥(宋復興)이고, 할아버지는 송전(宋琠)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송승은(宋承殷)이다. 부인은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기묘명현인 묵재 이문건(李文健)의 손녀이다.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 10여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면서 문장을 떨쳤고 사계 김장생(金長生)과 우의를 맺었다. 1570년(선조 3) 20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157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으며, 다음해에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1579년에는 박사(博士)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외직에 나가 유학을 진작시켰다. 1583년 사헌부지평으로 들어와 예조·호조·공조의 정랑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두 차례에 걸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經歷), 집의, 사간과 사재감(司宰監), 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에 집의(執義)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고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 왜구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임지에 도착하여 방비를 굳게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 하자 이때 부사인 그는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나타냈다.
그뒤 적군은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분전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임금님이 계신 북쪽을 향해 절하고 단정히 앉은 채 왜병에게 피살되었다. 일본장수인 히라요시(平義智) 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한다.
[상훈과 추모]
후에 이조판서·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부산의 충렬사(忠烈祠), 황해도 개성의 숭절사(崇節祠),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흥덕구 수의동의 충렬사(忠烈祠),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의 정충사(旌忠祠), 함경북도 경성(鏡城)의 화곡서원(禾谷書院) 등에 제향되어 있다.
[묘소]
흥덕구 수의동 산1-1에 있다. 묘소 아래에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쓴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