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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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洬 |
영어음역 | Sin S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용만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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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 1600년 |
몰년 | 1661년 |
본관 | 고령(高靈) |
자 | 호중(浩仲) |
호 | 이지당(二知堂) |
아버지 | 신경락(申景洛)|생부 신경식(申景植) |
어머니 | 안동김씨(安東金氏)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농학자.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호중(浩仲), 호는 이지당(二知堂)이다. 승지 신경락(申景洛)의 아들이며, 족부 영원군(靈原君) 신경식(申景植)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1624년(인조 2) 진사로서 명경시(明經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시험관의 천거로 별제(別提)에 제수되고, 이어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호조낭관·옥천현감 등을 역임하였고, 1644년 영주군수(榮州郡守)로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였다.
중앙으로 와서 지평을 거쳐 필선이 되어 동궁(東宮:孝宗)을 보도하였다. 여러번 문·무의 시험을 관장하였고 장령을 거쳐 1649년 인조가 죽자 사성으로서 산릉감역(山陵監役)에 임명되었다.
그 뒤 승지 및 참의에 의망되었으나 인척관계에 있는 김자점(金自點)이 죄를 입어 축출되자 연안현감으로 나갔다. 김자점이 역모죄로 복주(伏誅)된 뒤 양주목사가 되었는데 역적의 지친(至親)을 관직에 둘 수 없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대사헌 홍무적(洪茂積)의 변론으로 논의는 그쳤으나 그 일로 끝내 벼슬은 크게 떨치지 못하였다. 뒤에 공주와 청주의 목사를 연이어 맡았는데 감사와 병사가 잇달아 표창을 건의할 정도로 정사를 잘 돌보았다. 지방관으로서 무실(務實)에 힘쓰고 개혁을 하되 급격히 하지 않아 힘들이지 않고 많은 일을 하여서 감사 및 병사·방어사(防禦使) 등에 자주 천거되었으나 요로에 그를 아는 사람이 없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술]
7대조 신숙주(申淑舟)의 문집인 『보한재집(保閑齋集)』을 1644년에 개간, 보급하였다.
1655년(효종 6) 공주목사로 있을 때 『농사직설(農事直說)』의 간행본을 구하기 어려운 것을 한스럽게 여겨 당시의 달라진 속방(俗方)을 첨가하는 한편, 주희(朱熹)의 『권농문(勸農文)』·『금양잡록(衿陽雜錄)』·『사시찬요(四時纂要)』 등을 함께 묶어 『농가집성(農家集成)』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며, 17세기의 농업기술을 연구하는 데 요긴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