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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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世桓 |
영어음역 | Han Sehw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석린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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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 1470년 |
몰년 | 1522년 |
본관 | 청주(淸州) |
자 | 공서(公瑞) |
출신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
아버지 | 한운(韓運) |
어머니 | 이신(李愼)의 딸 |
시호 | 공간(恭簡) |
[정의]
조선 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공서(公瑞)이다. 지금의 상당구 방서동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첨정 한운(韓運)이고, 어머니는 이신(李愼)의 딸이다.
[활동사항]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정자를 거쳐 정언이 되었다. 그 뒤 예조좌랑·병조좌랑·지평·병조정랑·승문원부응교·의정부검상과 사인 등을 거쳐, 1499년 봉교로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1년 질정관으로 천추사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돈녕부정이 되었다.
연산군의 학정(虐政) 심해지자 직언을 자주 하여 왕의 미움을 받아 승진되지 못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1507년(중종 2) 대사간이 되었고, 이어 동부승지·도승지·이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기근에 허덕이는 도민을 구휼(救恤)하였고, 돌아와서 한성부우윤을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그 뒤에 이조판서 겸 도총관을 지내고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1518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좌참찬 겸 지춘추관사가 되었으며, 1520년 다시 대사간이 되었고, 1522년 지중추부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중국사신을 접대하다가 과로로 죽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며, 품성이 온순·겸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