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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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道敎 |
영어공식명칭 | Chondokyo |
영어의미역 | Heavenly Way Teachings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224-6[사운로112번길 17-2] |
집필자 | 정호영 |
설립연도/일시 | 19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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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 손병희(孫秉熙)[1861~1922] |
대표 | 주선자 |
전화 | 043-255-7468 |
홈페이지 | 천도교(http://www.chondogyo.or.kr) |
[정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3]가 1860년 4월 5일 득도하여 창도한 동학을 3세 교주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1861~1922]가 1905년에 개칭한 종교단체.
[개설]
최제우는 득도 이후 시천주(侍天主, ‘내 안에 한울님을 모셨다’)의 가르침을 통해 양반, 천민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평등함을 주장하였다. 이는 조선의 봉건적 질서를 비판하고 동양을 침범하던 서양의 세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신념체계였다.
2세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최제우가 참형을 당한 이후 오랫동안 숨어 지내면서도 동학 조직을 더욱 공고히 하고 교조의 신원(伸寃)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부패한 정치에 대한 개혁요구와 척양척왜(斥洋斥倭)의 반외세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마침내 1894년 갑오동학혁명으로 이어졌다.
3세 교주 손병희는 근대적 종교개념을 적용하여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며 종지를 인내천(人乃天)으로 삼고 수행과 신앙방법을 오관(五款 : 주문, 기도 등 다섯 가지 수행방법)과 심고(心告 : 행동 하나 하나를 할 때마다 한울님께 고하는 일)로 정하였다. 1919년의 3·1독립운동 또한 천도교가 주도한 것이었다.
3·1운동 후 교역자 대부분이 체포, 투옥 당하자 청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노동, 농민, 어린이, 여성, 신교육, 출판문화 등의 다방면에 걸친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 『개벽』이 창간(1920년)된 것도 신문화운동의 일환이었다.
[변천]
청주의 천도교는 1860년에 포교되었다. 1864년대 천도교에서 전국에 14개의 접소(接所)를 두었을 때는 청주에 접소가 있었으며, 1890년대 6임제(六任制)를 실시할 때는 도소(都所)를 두었다. 그리고 동학난 때는 청주지방에서 10포(包)가 참가하였다. 청주교구는 처음 청원군 북이면에 있다가 상당구 대성동으로 옮기고 1922년부터 대성학교를 설립, 서창수(徐昌洙), 김영식(金英植) 두 사람이 운영하다가 1924년 김원근(金元根)이 인수하여 대성보통학교를 설립했다.
[현황]
천도교 중앙총부는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에 있다. 천도교 청주교구는 1906년 손병희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생가는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 있다. 현재의 천도교 청주교당은 흥덕구 사직동에 위치하며 매주 일요일 11시 집회를 갖는다. 동학사랑방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