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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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十月蜂起 |
영어음역 | Siwol Bonggi |
영어의미역 | Uprising of October |
이칭/별칭 | 추수봉기,가을봉기,10월 항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양수 |
[정의]
충청북도 청주에서 1946년 10월에 있었던 3.1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농민·시민봉기.
[역사적 배경]
미군정에서는 미곡소매의 최고가격을 정해서 미곡유통을 통제했고, 도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농촌지역의 쌀을 강제로 수집하는 방침을 각 시·군에 시달했다. 이른바 '미곡수집령(미곡공출)'을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에서 의도했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즉, 도시에서는 식량의 부족 사태를 초래했으며, 농촌에서는 시세보다 2~5배의 훨씬 낮은 가격에 강제로 공출 당했다.
[발단]
따라서 미군정은 도시민과 농민 모두의 원성을 사게 된 것이다. 결국 미군정의 무리한 미곡정책은 1946년 11월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추수봉기를 촉발시켰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어 12월 중순에 이르면서 남한의 전 지역에 걸쳐 파급되었다.
[경과]
이때 충청북도는 대체로 가을봉기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났다.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존재했던 영동에서만 소요가 발생하였다. 오히려 충청북도의 상황은 다른 지역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력을 파견하기도 했는데, 10월 3일경 군위 군청소재지에서 군중 1,000명이 경찰서장과 군수를 감금시키고 군청을 현지 ‘인민위원회’에게 넘길 것을 요구한 소요가 일어나자, 다음날 청주에서 파견된 경찰대가 군위의 봉기를 진압하기도 했다.
미군 측에서는 충청북도에서의 봉기가 경찰 및 그들과 함께 일한 우익집단의 협력과 신속한 행동으로 사전에 예방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1946년 12월부터 시작된 서울대학교 국립대학안 반대운동의 여파로 청주에서는 1947년 5월까지 청주사범학교, 청주중학교, 청주상업학교 등에서 소요가 있었다.
[결과]
1946년 추수봉기는 해방 후에 지속적으로 증폭된 사회적, 민족적 모순의 폭발이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제주도 등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60여일 동안 계속된 뒤 11월 중순 들어 미군과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