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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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婦 |
영어음역 | hyobu |
영어의미역 | filial daughter-in-law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집필자 | 김양수 |
[정의]
지극한 정성과 헌신적인 봉사로 시부모를 공경하고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여 시부모의 뜻을 받드는 며느리.
[개설]
효는 백행(百行)의 근거이며 만덕(萬德)의 근본이라 하여 전통사회에서는 가장 높은 덕목으로 여겼다.
효를 행함에 있어 하나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효경(孝經)』에서는 “무릇 효(孝)가 덕(德)의 근본이며, 모든 가르침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고, 스스로 입신(立身)하고 진리를 실천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김으로써 부모를 영광되게 하는 것이 효도의 끝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전통적 가족에서는 부계로의 가계존속을 중히 여겨서 부자관계를 다른 가족들 간의 관계보다 우위에 두며 ‘삼종지의(三從之義)’, ‘부필종부(婦必從夫)’를 최고의 부덕(婦德)으로 삼았고, 며느리로서는 부자관계에 준하는 행동규범에 입각하여 시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 몸을 편안히 돌보아드려야 하였다.
몸가짐을 단정히 보존하고 남편을 내조(內助)하여 입신출세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문을 빛내는 것이 효행의 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부공(婦功)은 아들을 낳아 대를 잇고, 시가(媤家)를 번창하게 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친정부모가 잡은 명당자리에 시가 조상의 묘를 써서 시가를 번창하게 하였다는 설화에서처럼 친정보다는 시가를 위하기도 하였다.
[효부설화]
효부에 대한 설화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 몇 가지로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사례는 몹시 가난하여 조석의 끼니조차 잇기가 어려운 나날을 지내고 있었는데, 시아버지의 환갑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아무리 궁리를 하여도 아버지의 환갑잔치를 할 도리가 없었다. 며느리는 생각 끝에 소담한 자기의 머리를 잘라 팔아서 그 돈으로 쌀을 사고 반찬을 마련하여 시아버지를 대접하였다. 이는 조정에 알려져 큰 상이 내려졌다.
청주지역에 이런 사례는 곽진은(郭鎭殷)의 처 이씨(李氏)가 있으며, 남편 곽진은도 효성이 깊어 1768년(영조 44)에 정려되었다.
두 번째 사례는 며느리의 효성으로 “눈이 먼 시어머니의 눈을 뜨게 한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가난한 집에서 홀로된 며느리가 소경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생각끝에 며느리는 굵은 지렁이를 삶아 먹어 보고 시어머니에게 드렸다. 시어머니는 고깃국을 맛있게 먹고 나서 이제 먹은 것이 무슨 고기냐고 물었다. 며느리는 숨길수 없이 지렁이 고기라고 대답하였다. 시어머니는 지렁이 고기라는 말에 “무엇”하고, 놀라는 바람에 소경의 눈이 떠졌다고 한다. 청주지역에 이런 사례는 김여산(金如山)의 처 김씨(金氏)가 있다.
[고전소설 효부전]
조동일이 소장한 작자, 연대 미상의 고전소설로 『효부전(孝婦傳)』이 있다. 민간설화를 윤색한 작품이나 그 문학적 형상화는 미흡한 수준의 범작이다.
태조대왕 즉위년에 나라가 태평하였는데, 충청도 옥천에 군자로 이름 있는 최만상이라는 자가 있어 1남 1녀를 두었다. 딸은 이름이 벽현으로 16세에 그 고을 박취의 아들 일근과 성혼하였으나, 일근이 6달 만에 병을 얻어 죽었다. 시어머니 유씨도 병들어 죽어 눈이 어둡고, 거동이 불편한 시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며 살았다. 하루는 친정어머니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고, 하루 기한으로 뵈러 가는 길에 큰 범을 만났다. 자신의 사정 이야기를 간곡히 호소하니 범이 길을 인도하여 주었다. 친정에 이르러 보니 자신을 다른 곳에 재가시키려는 친정식구들의 계교인 것을 알고, 바로 시댁으로 돌아갔다. 시아버지를 뵌 후, 통곡하며 범의 앞에 엎어지니, 범은 잡아먹기는 커녕 오히려 그날부터 쌀과 고기를 물어다 주었다.
어느날 벽현의 꿈에 범이 나타나 함정에 빠져 위급함을 호소하기에, 벽현이 그곳으로 찾아가 보니, 과연 함정에 빠져 관원들에게 죽임을 당할 지경에 놓여 있었다. 벽현이 관원들 앞에 나가 호소하고, 마을의 김원창이 또한 변호하여, 고을 원이 보는 앞에서, 벽현이 범의 입에 손을 가져다 대어 그것을 징험하고, 이윽고 범의 등에 타고 집에 돌아오고, 원도 뒤를 따랐다. 박취가 이 소식을 듣고는 눈이 떠지고, 다리가 펴졌다. 감사가 임금에게 장문을 올려서 벽현은 정렬부인에 봉해지고, 아버지와 시아버지, 그리고 망부(亡夫)에게 벼슬이 주어졌다. 모두 장수하고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당시 유교사회에서 시집간 며느리가 시댁 식구들을 잘 섬기면, 하늘의 복을 자연히 받게 된다는 식으로 소설을 구성한 것을 볼 수 있다. 고전소설은 사실적일 필요는 없이, 작가의 이념이 실현되면 그만이다는 식으로 허구화시켰는데, 실제 사회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설정은 부자연스럽지만, 해피 엔드로 소설을 마무리하였다.
[효부사례]
청주지역에 전하는 효부에 관한 다른 사례로, 크게 시부모에 대한 효(孝), 부모에 대한 효(孝), 남편을 섬기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시부모에 대한 효이다.
정의창(鄭儀昌)의 처 채씨(蔡氏)는 아버지의 병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린 일이 있었고, 시집간 후에 병든 어머니에게 젖을 짜 먹여 봉양하더니 을유년에 장계(狀啓)로 조정에 알려져 정려되었다.
손혁(孫赫) 처 박씨(朴氏)는 4년 시묘(侍墓)와 20년 이상 남편의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은 열녀(烈女)로 정려되었고, 열행이 뚜렷하였기에 장계를 올려 정려된 김당(金唐) 처 전씨와 여이현 처 김씨, 두 눈이 먼 시어머니가 병으로 누워 있어 6년간 간호한 이지동 처 김씨, 병자호란 때 남편 전사후에도 청상으로 남아 시부모를 봉양한 강득룡(姜得龍) 처 김씨가 대표적이다.
둘째, 부모에 대한 효이다.
한양조씨(漢陽趙氏) 조진혁(趙鎭爀)의 처는 효성(孝誠)하여 아버지의 병 몇 해에 하늘에 빌어 대신 앓을 것을 원하더니 하늘이 감동함인지 차도가 있었다. 시집간 이듬해 남편이 병이 생겨 갑자기 죽어 빈소를 마련한 후, 목을 매 자결하니 나이 19세였다. 여러 번 천정(薦呈)되었다.
셋째, 남편을 섬기는 것이다.
한득일(韓得一)의 딸이며, 안동 사람 김현의 후처로 시부의 제사를 지성으로 지내고 시모를 효성으로 섬기었다. 남편의 종기에 고름을 입으로 빨아 고치고 지아비 상에 읍곡(泣哭)하기를 그치지 않더니 다음날 목욕하고 목을 매고, 남편을 따랐다. 이때에 나이 25세로 목사가 추천하여 청표(請表)하였다.
사경을 헤매는 남편을 위해 자신의 피를 받아 먹인 이흔 처 라씨와 김여산 처 이씨, 임진왜란 때 남편을 구하려 왜적에 대항했던 신예남(申禮男) 처 민씨(閔氏), 또한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붙잡혔다가 죽임을 당한 이영시(李榮時) 처 하씨 등이 효부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