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3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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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生活 |
영어음역 | uisaenghwal |
영어의미역 | fashion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집필자 | 양경애 |
[정의]
몸에 걸치거나 입혀져 신체를 보호하고 장식하는 의류 및 장신구 등을 주요 요소로 하는 인류의 생활.
[개설]
현대 한국인의 의생활은 크게 한복과 양복 양식으로 대별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복식인 한복은 삼국시대부터 저고리와 바지, 치마, 포, 관모, 신발 및 각종 장신구 등을 갖추었다.
한복은 시대 변화에 따라 그 길이가 짧아지거나 길어지고 품이 넓어지거나 좁아지는 등의 세부적인 변화는 겪지만 위·아래가 나누어진 기본 구조는 꾸준히 지속되어 한국복식의 유구성과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의제개혁(甲申衣制改革)을 필두로 의제의 간편함과 실용성을 법령으로 강조하면서 다양하였던 조선시대의 포(袍)는 두루마기 하나로 통일되며 한복의 형태는 크게 간소화되었다. 더욱이 1895년에는 단발령이 시행되고 1904년에는 각부 고급 관리들에게 단발과 양복을 입도록 하여 관복이 양복으로 바뀌었다.
또한 신교육의 보급과 여성의 사회 진출 그리고 1950년의 한국전쟁과 1970년대의 경제발전 등을 겪으면서 한국인의 의생활은 일상복으로서 양복과 명절이나 행사 때 착용하는 의례복으로서의 한복이라는 이중적 의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청주지역의 의생활도 한국인의 전반적 의생활과 같은 범주에서 발전하고 있어 양복이 압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으나, 최근 들어 한국인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고양하기 위한 일환으로 한복의 일상성을 강조한 생활한복을 보급하여 유치원 예절교육복식, 고등학교의 교복, 각 종 서비스업의 유니폼 등에 활용하고 있다.
[변천]
복식은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을 반영하며 외부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적응하며 존속한다. 즉, 긴 세월 동안 한복이 한민족의 옷으로 사랑 받았다는 사실은 안팎에서 주어지는 온갖 자극을 수용하는 유기체같이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남았음을 뜻한다. 복식은 일차적으로 기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갖추어야 한다.
청주지역은 중위도 지대에 위치한 우리나라 기후구에서 중부내륙형에 속하며 여름에는 온난다습하고 겨울에는 한랭건조하여 계절에 맞는 다양한 의복재료와 의복형태를 발전시켰으며 인접한 지역들과 큰 차이 없는 의생활을 하고 있다.
청주지역의 의생활 가운데 의례복으로 입혀지고 있는 한복을 중심으로 그 변천과정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청주인근 지역에서 출토된 복식유물 중 1977년 청원군 북일면에서 순천김씨의 묘에서 발견된 임진왜란 이전의 복식유물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갈색누비 명주 천릭(天翼, 貼裏)은 천릭의 원형(原型)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천릭은 이중깃인 점이 주목되는데 신라(新羅)의 당금(幢今)이 반월형인 것과 일치하여 신라 복식의 복원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천릭을 통하여 여자도 상하통복(上下通服)으로된 천릭을 평상복으로 입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 저고리의 형태는 몽땅하고 겨드랑이에 무가 달려 있으며 당시에 삼수(縿袖)가 상당히 넓은 특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깃의 모습은 대부분 겹깃의 형태이며 고색(古色)을 띠고 있어서 이전시기의 저고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넷째, 포(袍)는 조선 초기의 포로서 직령(直領)의 형태가 밝혀짐으로써 광해군(光海君)의 직령과 함께 대표적인 포의 형태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1985년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경리 경수부락에 위치한 안동김씨 묘역이 중부고속도로 호법인터체인지 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이 묘역을 옮기던 중 3기의 묘에서 복식이 출토되었다.
이 묘는 안동김씨 하당공(荷堂公) 김첨(金瞻)의 것이며 16~17세기의 복식(服飾)유물이 출토되었다.
김첨은 임진왜란 8년 전인 1584년에 졸(卒)하였으므로 복식의 연대는 임진왜란 이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출토복식은 직령포(直領袍) 2점, 솜이불 1점 등 3점이다. 특히 명주 겹솜누비 직령포는 깃과 삼각부에 화문단(花紋緞)을 사용하고 소색 명주에 갈색 끝동을 달았으며, 삼수(衫袖)를 배합하여 1.2㎝의 잔누비로 처리한 누비창의(氅衣)로서 깃은 목판깃이고 동정은 소색을 달았다. 삼수에 끝동과 안동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김첨의 딸 복식은 묘 이장시 미이라화된 시신과 함께 복식이 출토되었는데, 나이는 15~16세쯤으로 추정되고 머리를 땋고 있었으며 복식은 화려하다. 출토복식은 저고리 2점과 명정(銘旌) 1점 등 3점이다. 이 가운데 명주겹 감수저고리는 소매에 넓은 삼수(杉袖)를 달고 갈색 깃을 하였으며 동정이 잇고 옆에 단 무(襠)와 앞자락에 갈색의 무가 달려 있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그리고 김대경(金大敬)[1632~1695] 처 원주원씨(原州元氏)의 출토복식은 저고리 1점, 치마 3점, 단속곳 1점, 목도리 1점, 보자기 1점 등 9점으로 여성 복식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저고리는 삼수와 끝동이 진한 갈색 무명이고 소매와 길은 연두 무명이며 깃은 갈색 무명의 당코깃 형태를 지니고 있다. 김첨의 딸과 원주원씨의 저고리 아래 단에 회장(回裝)이 달려 있는 것은 저고리의 변화를 주기위한 한복 고유의 미적 슬기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현황]
현대한복은 의례복으로서 자리매김하였고 특히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명절복, 파티복, 무대복으로 입혀지며 지극히 짧은 저고리와 바닥까지 끌리는 길고 폭넓은 치마에 장식을 많이 한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치마는 플레어스커트처럼 재단하여 넓고 길게 하였으며 치마 속에 페티코트를 입어 A자(字) 실루엣을 만들었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요란하고 화려한 한복은 민족 고유의 전통미를 해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근래 들어 점차 색상 배합과 형태에서 전통적인 한복을 모방하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민족 주체성을 고양하고 우리 것을 사랑하고 찾자는 목적 아래 1996년 12월 4일 첫째 토요일을 「한복 입기의 날」로 문화체육부(현 문화관광부)가 선포하면서 한복 입기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남자 한복을 계절별로 살펴보면 봄과 가을에는 흰색 무명으로 바지, 저고리를 지어 입고, 여름에는 삼베나 모시로, 그리고 겨울에는 비단으로 만든 바지, 저고리와 조끼, 마고자, 토시 그리고 두루마기까지 입으면, 한국의 사계절을 슬기롭게 지낼 수 있는 차림새가 된다. 자연소재를 택하여 요란스럽지 않으나 슬기롭고 질박하게 한국의 사계절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지혜가 돋보인다.
봄 가을의 남자 흰색 무명 바지와 저고리는 한민족이 선호한 흰옷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고대부터 조상 대대로 입어 온 의복재료인 저포나 견포, 면포 등은 그 자연 그대로의 색이 하얗다. 마포는 노란빛이 나나 세탁할수록 탈색되어 결국은 하얀빛이 된다. 이러한 자연 그대로의 색감이 결국은 일상복의 주요한 색으로 자리매김하고 그토록 억세게 계승된 백의의 전통이 아닌가 한다. 『위지』나 『양서』, 『동이전(東荑傳)』 등 고대 중국 문헌에도 부여나 변한, 진한 때부터 우리 한민족이 흰옷을 애착했다고 적혀 있어 흰옷을 숭상한 뿌리 깊은 연원을 짐작케 한다.
여름 한복은 삼베와 모시로 지어 몸에 감기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해 남들이 느끼는 더위와는 사뭇 다른 시원함을 맛볼 수 있다. 특히 한국인의 의생활 재료로 사랑받아 온 세모시는 가볍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잠자리 날개와도 같아서 옷 한 벌을 물에 적셔 사발에 넣으면 사발 속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가늘고 곱다 하여 사발옷이라고도 부른다.
겨울에는 솜을 얇게 두어 두루마기까지 덧입으면 따뜻함과 품위를 함께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청주지역 남자들의 한복 착용은 설이나 추석 등 명절에 주로 입을 뿐이며 격식을 갖춘 두루마기 대신 마고자와 조끼만으로 성장을 하는 경향이 있어 더욱더 한복의 간소화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