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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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國-淸州- |
영어의미역 | Cheongju Arirang, loved even in Yanbian, China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철웅 |
[아리랑의 의미]
「아리랑」은 지금까지 우리 겨레 속에서 전승되고 있는 민요 가운데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이며 독보적인 노래이다. 「아리랑」은 우리 민요의 아름다움이요, 우리 겨레의 상징이다. 가락과 노랫말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전국적으로 「아리랑」이 불려지지 않는 곳이 없으며, 생황양식이 바뀌고 정서가 변해도 「아리랑」은 그 끈질긴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아리랑」은 언제나 우리 삶의 애환과 정조를 애조 띤 가락에 담아 높은 문학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카타르시스이다. 거기에는 한과 용서, 은근과 끈기, 그리고 좌절과 극복의 정신이 배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랑」을 일컬어 우리 겨레의 꽃씨와도 같다고 한다. 우리 겨레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끈질기고 굳세게 자라 마침내 꽃을 피우는 것이다. 특히 이국땅에서 듣는 「아리랑」은 시련과 절망의 아픔, 그리고 이를 극복한 한민족 고유의 역사적인 강인한 인내력을 가슴에 묻어나게 해 준다.
「아리랑」을 세계 도처의 한민족들이 함께 부를 때 감동이 몰려와 목이 메고 서로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은 노랫가락 구비마다에 그리고 노랫말 하나하나에 우리만의 고유한 정서와 문화가 생명처럼 녹아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힘의 원동력이다. 「아리랑」은 우리의 맥박이요 민족의 소리인 것이다.
[아리랑에 스며 있는 한민족의 정서]
「아리랑」에는 늘 ‘아리랑 고개’가 등장한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거나 아리랑 고개로 넘겨 달라는 서로 상반된 입장에서 아리랑 고개를 노래한다. 과연 우리 겨레가 아리랑 고개에서 추구하고 소망하는 의미와 정서가 무엇일까?
고개는 크고 작은 산을 넘으려면 으레 만나는 고통과 희망과 안식의 숭고함이요, 경외와 기원의 미스터리다. 고개는 미지의 불확실한 세계로 나아가는 설렘과 두려움의 문이요, 마을의 수호신과 산신령이 지배하는 엄숙한 성지요, 인적 물적 자원이 교차하는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요,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부터 고개를 오르내리는 것을 인생에 비유했던 것이다.
아리랑 고개는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넘던 고난과 소망과 기원의 분수령이었고, 눈물을 뿌리며 넘던 절망과 이별과 후회의 장소이었다. 백두산을 넘나들고 두만강과 압록강(鴨綠江)을 넘어 일제와 싸우는 투사들에게는 혁명의 존엄함이었다. 과연 아리랑 고개는 슬픔에서 기쁨으로, 좌절에서 극복으로, 어둠에서 밝음으로 넘어가는 인생의 전환점이요, 자기가 당면한 인생역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하는 현실을 뜻하는 것이다.
[청주아리랑의 발굴과 채집]
1. 발굴장소와 생활상
「청주 아리랑」이 발굴된 곳은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도문시 량수진 정암촌(亭岩村)이다. 이곳은 1938년 충북의 청주군, 옥천군, 보은군, 충주군, 괴산군의 농가 180여 호의 주민들이 청주역에서 만주행 이민열차를 타고 사흘만에 함경북도 온성역에 도착한 후 도보로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들어가 개척한 마을이다. 두만강에서 2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골마을인데, 그 서북쪽 산에 높이 서 있는 정자바위의 이름을 따서 정암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암촌에는 처음에 80여 호의 충북 이민들이 살다가 광복 후 과반수의 사람들이 귀국하였고, 지금은 초기의 이민 30여 명을 포함하여 그 2·3세들이 생활하고 있다. 이주한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생활난으로 허덕이는 농민들이었으며, 이민 후의 생계수단은 주로 농업이었다.
2. 발굴에 얽힌 이야기
「청주 아리랑」을 발굴하고 소개한 데에는 충북대학교 국문과 교수이며 정암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임동철 교수의 공로가 지대하다. 임동철 교수는 1993년부터 여러 차례 정암촌을 방문·답사하면서 정암촌의 역사와 주민들의 생활 실상과 「청주 아리랑」을 청주에 전하는 한편 정암회를 만들어 청주시민과 충북도민이 정암촌을 도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발전하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정암촌의 「청주 아리랑」은 1978년 교포학자 김봉관(현재 도문시에 거주) 선생에 의해 처음 채록되었다. 김봉관 선생은 무게 20㎏이나 되는 구형 녹음기를 들고 정암촌을 찾아 충청도 민요를 수집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 당시 명창이랄 만한 실력자 신철 선생을 위시한 몇몇 노인들이 부른 고향의 노래를 어렵사리 녹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충청도아리랑」의 작가 리혜선씨의 말에 의하면 당시 정암촌 주민들은 아이들에게 밥을 먹기전 ‘고향이 어디냐’고 확인한 후 밥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청주 아리랑」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입에서 입으로 대물림을 하며 만주 속의 청주인 정암촌에 남아 있다.
「청주 아리랑」의 발견은 분명 청주문화 정체성 확립의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청주사람들의 민요가 거의 잊혀지고 강원도 정선지방의 민요에 동화될 무렵, 만주에서는 청주의 얼을 지키고 있었다. 이 역시 「정선 아리랑」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가사와 음정에는 청주의 체취가 물씬 묻어난다. 임동철 교수가 「청주 아리랑」을 다시 채록할 때 노래를 불러 준 제보자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리용안(남, 1927년생) : 12세에 부모를 따라 청주군 강외면 동평리에서 이주하였다.
김남석(남, 1928년생) : 11세에 청주군 강외면 오송리에서 이주하였다.
최경백(남, 1928년생) : 11세에 보은군 보은면에서 이주하였다.
리옥선(여, 1937년생) : 2세에 어머니 등에 업혀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에서 이주하였다.
서강숙(여, 1930년생) : 9세에 충주군 엄정면 농강리에서 이주하였다.
리종성(남, 1925년생) : 10세에 청주군 북이면에서 이주하였다.
박선규(여, 1935년생) : 4세에 청주군 강외면에서 이주하였다.
[청주아리랑의 감상]
1. 「청주 아리랑」의 가사
중국 연변의 교포 작가 리혜선 선생이 저술한 『두만강의 충청도아리랑 - 연변의 충북마을, 정암촌 60년사-』에 나오는 「청주 아리랑」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연변의 김봉관 선생이 1978년 10월에 정암촌에 사는 건장한 57세의 명창 신철 선생(1931년에 출생, 1992년에 사망)이 부른 「청주 아리랑」을 녹취한 것이다(도서출판 좋은날, 2001).
「청주 아리랑」(1)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울 너머 담 너머 님 숨겨두고
난들 난들 호박잎이 날 속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팔라당 팔라당 갑사나 댕기
고운 때도 안 묻어서 사주가 왔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사주는 받아서 무릎에 놓고
한숨만 시여도 ¹⁾동남풍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아리랑 고개가 얼마나 멀어
한번 가면 언제나 오신다든지
「청주 아리랑」(2)
시어머니 죽으며는 좋다더니
왕골자리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시아비야 죽으며는 좋다더니
빨랫줄 끊어지니 또 생각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시어머니 골난 데는 이 잡아 주고
시아버지 골난 데는 술 받아 드리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시애끼 골난 데는 사탕 사다 주고
며늘아기 골난 데는 홍두깨 찜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청주 아리랑」(3)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팔르랑 팔르랑 갑사나 댕기
고운 때도 안 묻어서 사주가 왔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사주는 받아서 무릎에 놓고
한숨만 시여도 동남풍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아리랑 타령을 그 누가 냈나
이웃집 김도령 내가 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아리랑 타령이 얼마나 좋은지
밥 푸다 말고서 엉덩춤 춘다
「청주 아리랑」(4)
아리랑 타령을 그 누가 냈나
이웃집 김도령 내가 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타령이 얼마나 좋은지
밥 푸다 말고서 엉덩춤 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팔년에 왜난리 나고
갑오년 이후로 왜동물 치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맹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깨 방맹이 팔자가 좋아
큰아기 손길로 놀아만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주석: 1)시여도 : ‘쉬어도’의 방언형
김봉관 선생과 임동철 교수가 2002년 11월에 정암촌을 다시 찾았을 때 박성주 옹과 리용안 옹이 부른 「청주 아리랑」은 다음과 같은 가사로 되어 있다.
「청주 아리랑」(5)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달라당 달라당 갑사댕기
본때도 안 묻어서 사주가 왔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사주랑은 받아서 무릎에 놓고
한숨만 쉬어도 동남풍 된다
시아버지 골난 데는 술 받아 주고
시어머니 골난 데는 이 잡아 주자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새애끼가 골난 데는 엿 사다 주고
며느애기 골난 데는 홍두깨 찜질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시아버지 죽으면 좋댔더니
빨랫줄이 끊어지니 또 생각난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시어머니 죽으면 좋댔더니
보리방아 묽어노니 또 생각나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시애끼가 죽으면 좋댔더니
나뭇가리 쳐다보니 또 생각난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서방님이 죽으면 좋댔더니
잠자리 들 때마다 또 생각난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타령을 그 누가 냈나
이웃집 김도령 내가 냈지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타령이 얼마나 좋은지
밥 푸다 말고서 엉덩춤 춘다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아리라랑 스리라랑 아라리요
임동철 교수는 제보자들의 단편적 노래들을 나름대로 재정리하여 2003년 10월에 열린 청주아리랑 한중학술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청주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울 너머 담 너머 님 숨겨두고 난들난들 호박잎이 날 속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팔라당팔라당 갑사나 댕기 고운 때도 안 묻어서 사주가 왔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사주는 받아서 무릎에 놓고 한숨만 쉬어도 동남풍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시아버지 골난 데는 술 받아 주고 시어머니 골난 데는 이 잡아 주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시동생 골난 데는 엿 사다 주고 막내동서 골난 데는 홍두깨 찜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시아버지 죽어서 좋댔더니 왕골자리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시어머니 죽어서 좋댔더니 보리방아 물저노니 또 생각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이창배 선생의 한국가창대계에 수록된 「길림성의 청주아리랑」은 다음과 같은 가사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날 가라네 날 가라네 날 가라네
삼베질쌈 못한다고 날 가라네
삼베질쌈 못하는 건 대단하고
아들딸 낳아준 건 대단찮나
시아버지 죽어서 좋댔더니
왕골자리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시어머니 죽었다고 좋댔더니
보리방아 물저노니 또 생각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2. 해설
「아리랑」에 반복법과 대구법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들 수사법의 활용은 동일한 단어나 뜻이 같은 단어의 가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주며, 이로써 형식적 통일을 기할 수 있고, 기억과 이해를 용이하게 해 주며, 가락의 생동감이 넘치게 해 준다.
「청주 아리랑」은 비교적 정형화된 3음보 율격과 특정 공식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와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청주 아리랑」의 가사는 수줍은 처녀의 여리고 앳된 모습으로부터 결혼 후 현실에 적극 순응하며 고난의 세월을 이겨나가는 강인한 여성의 모습까지, 그런 가운데서도 결코 잃지 않는 해학과 익살과 부드러움과, 그리고 주로 여성의 인생역정에서 부딪치는 애환을 그저 담담한 정서로 그리고 있다.
「청주 아리랑」은 한편, 실연의 아픔을 티 없이 발랄하게 토로하지 못하고, 과거에 대한 후회 또는 정인에 대한 애증 역시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혼자서 한탄하는 애달픈 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시집식구들과의 관계에서 건강하고 건전하게 순응·순종하는 충청도 아낙네의 소박한 품덕을 표현하고 있고, 살아생전에는 원망 한번 제대로 못하고 지내던 시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감명 깊게 노래하고 있다.
3. 「청주 아리랑」의 선율
「청주 아리랑」의 선율은 8분의 5 박자에 '333 3|666 6|------'인데, 실제 노래에서는 ‘333 36|666 6i|------’으로 변이되는 경향이 있어서, 첫 소절 네 박의 ‘미’ 4분 음부를 두 개의 8분 음부로 분해하여 제 5박을 ‘라’로 올려 쳐 주며, 제2소절의 네박의 ‘라’ 4분 음부를 두 개의 8분 음부로 분해하여 제5박의 ‘라’를 높은 ‘도’로 올려 쳐 주므로 선율 자체의 동성을 가져오는 특징이 있다(길림성의 「청주 아리랑」은 3박자와 2박자가 혼재되어 있는 혼합자로서 불규칙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불규칙한 리듬은 규칙리듬의 변형으로 익히는 데 많은 훈련이 필요하며, 그만큼 전문성을 더 필요로 한다).
제1절 첫 음은 우조에서의 조성이 모호하고 희미한 ‘상음’을 사용하기 때문에 시작부분이 무언가 할 말을 다하지 못한 애매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정서적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상음’의 사용은 또한 아직 어리고 천진난만한 소녀에게 혼인의 굴레를 씌우는 옛 봉건세습제도에 대한 불만과 반항심리를 표현하고, 대항할 힘이 전혀 없는 소녀가 그저 안타까움에 한숨짓는 심정의 토로에 매우 적합한 것이다.
[의의와 평가]
「충청도아리랑」의 작가 리혜선 선생에 의하면 당시 정암촌 주민들은 아이들에게 밥을 먹기 전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 대답을 확인한 후 밥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청주 아리랑」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입에서 입으로 대물림을 하며 만주 속의 청주인 정암촌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청주 아리랑」의 발견은 분명 청주문화 정체성 확립의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청주 사람들의 민요가 거의 잊혀지고 타도의 민요에 동화될 무렵에도 만주에서는 청주의 얼을 지키고 있었음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중국사회가 개방의 물결을 맞기 시작하면서 「청주 아리랑」의 보존에 관한 문제가 생겼다. 인구 이동이 잦아지자 정암촌 인구의 상당수도 도시로 빠져 나가고 많이 줄어든 것이다. 학생수가 모자라 인근 초등학교가 폐교되기도 하였다.
김봉관 선생은 이제 「청주 아리랑」을 청주에서 품어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연변지역에 불어닥친 급격한 사회변화로 더 이상 「청주 아리랑」의 보존을 정암촌에 맡겨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되살아난 「청주 아리랑」의 보존은 청주시민의 몫으로 돌아왔다. 청주에는 청주를 대표할 만한 다른 노래가 없다. 「청주 아리랑」의 원형을 잘 보조하고 또 한편으로는 여러 모양으로 발전시켜 청주의 노래로 애용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60여 년만에 다시 이어진 「청주 아리랑」의 맥은 바로 우리 청주시민의 관심과 노력에 힘입어 보존되고 전승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새롭게 발전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