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4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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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岩洞- |
이칭/별칭 | 화암,그럼바위,그름바우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문암동 |
[그름바위]
옛날에 그름바위라고 했어요. 옛날에 보믄 그전에는 물이 좋고, 별주부 자라 그걸 잡으려고 말야 그름바위, 오면은 바위가 있잖소, 갈래졌지 그전에는 한 여러믄이 앉아서는 농사짓는 밥을 식사를 하고는 했거든. 그런데 제방으로 돌을 가져다 쌓는 바람에 죄다 없어졌어. 그전에 전설이라는 게 옛날에 거기서 바위가 있어서 그름바위여.
(선비가 많아서는 무슨 이야기에요) 그건 내가 이야기 할게, 그전에 선비 삼형제 분이 계셨는데 여기서 글을 해가지고 우리 동네에 셋집이 살았거든, 여기는 처음에 7대조 할아버지 전주이씨(全州李氏)하고 조씨(趙氏)하고 오씨(吳氏)가 있었어, 셋이 동서간이에요 여기 내려온 게 오씨(吳氏)는 보성오씨(寶城吳氏), 제일 시초여, 낙향을 하신거지. 귀양을 왔다는거 같아. 아니여 베슬을 마다하고 온 겨 낙향이라는 거. 옛날에는 사주면 서암리였었어, 그래서 항상 바위 암(岩)자는 그걸 상징해서 청주시로 편입되면서 문암이라고 한거여. 옛날에는 무심천(無心川)이 지금 현재의 지류로 흐른 게 아니고 이짝 송절로 해 가지고 바위 밑으로 흘렀거든 왜정시대에 제방 뚝을 쌓는 바람에 이렇게 된거지 옛날에는 돌아서 바위 밑으로 흐른 거라구. 거기서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물은 모랭이를 지나서 쓰레기 매립장으로 갔다는 거여. 생각해 보니까 그름바위가 아니라 그림바위 같아 그림 같이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해서.
(제보자 : 이채민, 남, 1936년생, 청주시 흥덕구 문암동 180)
그름바위, 그래서 글월 문(文) 바위 암(岩)이야 그래서 문암인데 요 밑에 내려가면 모실기에 큰 바위가 있었어요. 넓은 바위가 거기에. 시초로 거기서 서당이 생겨가지고 조씨(趙氏), 이씨(李氏), 오씨(吳氏) 그 삼승(성)이 거기서 공부를 했어, 그래서 여기 조씨(趙氏)가 있고, 이씨(李氏)가 있고 오씨(吳氏)는 송절동에 있었는데, 문암동 그름마을이라는 것은 조씨(趙氏), 이씨(李氏), 오씨(吳氏) 세성이 모여서 글을 배운 바위가 거기 있었어 입구에. 지금은 인제 개발이 되어 가지고 없어졌어. 흔적만 남아 있고, 그래 가지고 글월 문(文) 바위 암(岩) 바위에서 공부를 했다 해가지고, 문암동이라고 해가지고 문암동, 그름바위라 한다.
(제보자 : 이채명, 남, 1930년생, 청주시 흥덕구 문암동 168)
[무당바위]
저 너머 산 입구에 무당바위라는 게 있었어. 지금도 그 바위는 시방 남아 있어요. 무당이 거기서 춤을 추다가 빠져 죽은 데여. 옛날에 그 밑으로다 개울이 지나갔지 큰 개울이 지나갔는데 거서 무당이 춤을 추다가 빠져죽었다고 …금렵을 했어, 금을 캤다고 구덩이를 커다랗게 파서, 그 바람에 거기가 훼손이 됐지
(제보자 : 이채명, 남, 1930년생, 청주시 흥덕구 문암동 168)
[부처골]
요 너머가 부처골인데, 현재 그 안에 부처가 어디 파묻혀 있을 거여 못 찾고 있는 건데, 왜 부처골이냐 하면 절터가 있었어. 절이 있었는데 거기 인저 부처가 저 뒤로 향하고 있어서 그 근방에 여인네들이 전부 바람이 나가지고 도망을 가버렸어. 그래가지고 그걸 방지하려고 정상, 정하, 토성안 이런 동네 사람이 와 가지고 부처를 때려 부수고 절을 때려 부숴버렸어요. 그 후로부터는 들했다, 그래서 지금도 요 너머에 부처골은 있어요. 아무 흔적도 없어요.
(제보자 : 이채명, 남, 1930년생, 청주시 흥덕구 문암동 168)
절이 있었는데 절이 있으니까 부처가 있을 거 아냐. 저기 저 저쪽으로 스면은 그 동네 부녀자들이 바람끼가 나가지고, 가정파탄이 나가지고, 그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와 가지고, 그 부처를 때려 부숴가지고 묻어버렸다. 현재도 여기 부처가 묻혀 있다는 거지.
또 있어, 우리 밭에 부처골이라고 있었어. 부처골은 부처가 있어 가지고 무당이 장자납 있잖아요. 거기서 말이야, 푸닥푸닥하면 푸닥거리가 하면 부처가 있다는 거여. 우리 어, 그래서 부처골이라는 거여. 그전에 보면 그 옛날 양반들이 얘기하면 말여 거기서 뚜드리면 저기 빛이 나간댜. 그러면 용이 나온나는 겨. 장자납에서 있었어. 지금은 메웠어. 부처골은 우리 밭에 있는 데 지금도 파보면 옛날 기와 같은 것도 나오고, 석기시대 거도 나오고, 옛날에 거기다 집을 졌었던가. 벼 나와요, 뭔가 있는 것도 같아요.
(제보자 : 조길환, 남, 청주시 흥덕구 문암동, 구통장)
[끊어진 혈]
저기 여기 들어오는 데, 왜정 때 나는 형님한테 들었어. 왜 뭐 뱀 모가지 같이 생겼잖아, 그걸 끊었다는 겨 혈맥을. 여기 들어오면서 있어. 돌 많은 산 이렇게 됐지, 거북이 마냥 되었다구. 근데 왜정 사람들이 여그 높은 사람들이 많이 난다고 쉽게 말해서, 그걸 끊었다는 겨. 그렇게 했는데 거기서 피가 술술 나오더라는 겨. 잘은 몰라도 여기 전설이여.
(제보자 : 이채민, 남, 1936년생, 청주시 흥덕구 문암동 180)
[장자납]
까치내라고 있어, 까치내 바로 인접한 데가 오창면 신평리라고 앞뜰에 늪이 있었는데 장자늪이야. 장자늪 이름의 유래를 대충 저기하면 옛날에 큰 부자가 거기다가 집을 짓고 사는데 하루는 중이 시주를 하러 그 집에 갔단 말이여. 갔는데 그 주인 아저씨가 원래가 참 뜬뜬하고 욕심이 많고 심술이 많아가지고 남한테 베푸는 일을 못해. 마침 그때 머슴이 오양간이라고 짚을 빼 치는 데가 있어요. 그래 중이 시주를 하니까 주인아저씨가 하는 말이 “저 중놈한테 오양 한바가치만 떠다 주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거기 며느리가 마음이 좋은 며느리가 "아버지 그러면 안 됩니다". 하고서 광으로 가서 쌀을 바가지에다 퍼 다가 시주를 한 겨. 그러니까 중이 하는 이야기가 아줌마는 "나를 쫓아오되 뒤를 쳐다보지 말고 무슨 일이 나더라도 뒤를 쳐다보지 말고 쫓아오쇼" 그래서 이상하다 하고 가는데, 중은 가는 구들을 메고 가는데, 그런데 급작시리 그냥 천둥이 나고, 비가 막 쏟아지고, 그러는데 금방 자기 집이 떠날 것 같거든. 그러니까 돌아보지 말라는 걸 잊고서 돌아봤거든, 그새에 그 메느리는 거기 장승이 되가지고 돌이, 현재 거기 있었어요. 그 집은 금방새 늪이 되 버렸어요. 옛날에 장자(長者)가 살다가 늪이 돼 버렸다고 해서 장자늪인데, 날 좋을 때 가서 이렇게 보면은 금반화가 보여요 노랗게. 그짓말이 아니라 우리 어릴 때 구경 많이 댕겼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깊은가 하면은 이 장자늪에서 강서에 부모산이라고 있어. 부모산 그 부모산이 거기 왜 부모산이라고 하면 성을 쌓고 싸움을 하는데, 목이 하도 말라서 죽을 지경이거든. 그때 어떻게 해서 샘이 생겨서 물이 나왔어. 그래서 다 소생을 했어. 그래서 부모 같다고 해서 물을 먹고서 전쟁을 이겼는데, 장자늪하고 그 샘하고 연결이 됐다는 겨. 그래가지고서 지금 요 근래까지도 명주실을 감으면 상당히 길잖아. 이걸 갖다가 돌을 달아서 거기 넣으면 냐중에 저 부모산 그 샘에 그게 뜬다는 겨. 부모산도 그래서 부모산 유래가 생긴 거구. 장자늪도 유래가 생긴건데. 지금 과학단지가 생기는 바람에 오창에 앞으로는 그것도 없어질 형편이거든. 그래도 지금도 형태만 조금 남아 있어. 우리 어릴 때 학교만 갔다 오면, 말 있어 말. 말 따서 먹고, 또 항간에는 거기 사람 어린애 만한 고기가 있어 갖구, 인동에 있는 사람이 잡았다가 겁이 나서 돌려줬다는 전설이 있어. 장자늪이 지금도 있어. 크는 애들까지도 다 알고 있어요.
(제보자 : 이채명, 남, 1930년생, 청주시 흥덕구 문암동 79)
[까치내]
선비가 과거를 보러가는 도중에 거기에 주막이 있다 이거야, 그래 거기서 자구 가야 한양을 간다 이기여. 그래 자는데 밤중에 열이 나가지고 죽게 됐어. 그래 그 노파가 걱정이거든. 손님이 죽게 됐으니. 어떻게 하느냐 이거여. 그래 잠이 잠깐 들었는데, 어느 도사가 와가지고 이 사람은 댓까치를 먹여야 한다. 고것을 폭 삶아서 먹여야 산다. 이래서 그 노파가 얼른 일어나서 밤이다 이기여. 그래 아침에 어떻게 때까치를 삶아서 먹이니까 대번 낫더랴. 그래 이 사람이 다행스럽게 인저 한양을 가가지고 과거시험을 봤는데 합격이 됐다 이거여. 그래 그 사람이 ‘아하, 이 은혜를 갚을 수가 없구나 그러니께 내가 거기의 유래를 하나 저기를 해야 하겠다’ 하는 과정에서 까치내라고 내가 지어야 겠다. 까치내라고 지어가지고서 노파를 찾아왔다 이거여. 그래 와서루다 자기는 과거에 급제했다는 얘기여.
(제보자 : 이상은, 남, 1926년생, 청주시 흥덕구 문암동 167)
[효촌 유래]
효촌이 왜 효촌이라고 했느냐. 어려운 집이 꽤 살고 있었는데, 먹구 살기가 어려워가지고 남편은 일하러 갔고 그 부인은 집에서 누워 있는데, 어린애는 젖 달라고 상당히 우는겨. 그런데 그 어머이는 아파가지고 꿈쩍도 못하고 있는데, 그 어린애가 문지방에 서가지고 젖 달라고 막 우는데, 마침 그때 호유바람이 막 부른 바람에 문이 삭 닫히는 바람에 손가락이 뚝 끊어진 겨. 그래서 그 계집아이가 자기어머니한테 호 해달라고 입에다 댄게, 그 피가 안으로 들어가 가지고, 그 어머니가 소생을 한 겨. 그래서 효녀가 나왔다고 해서 효촌이라고 진겨.
(제보자 : 이채명, 남, 1930년생, 청주시 흥덕구 문암동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