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353
한자 東學農民戰爭
영어음역 Donghak Nongmin Jeonjaeng
영어의미역 Donghak Rebell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신영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연도/일시 1894년연표보기

[정의]

1894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일어난 동학계(東學系) 농민의 혁명운동.

[개설]

1894년(고종 31) 3월 사회개혁을 위하여 1차 봉기하고,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기습으로 빚어진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9월에 재봉기하여 1895년 초까지 삼남과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일대에서 관군, 일본군, 민보군과 전개한 전쟁이다.

청주는 남북접 농민군이 서울로 진군하는 길목에 위치해서 2차 봉기 시에 3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우세한 무기에 밀려서 읍성을 점거하지 못했다.

[배경]

1894년 청주지역에서 활동한 동학농민군은 동학교도들과 ‘원민(怨民)’이 합세한 형태로 구성된 민간 군대였다. 동학농민군은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기 때문에 동학 세력이 증대되었던 지역은 동학농민군 세력이 강력했던 특징을 갖고 있다.

청주에서 동학은 1883년 손천민(孫天民)이 처음 받아들여서 전파되기 시작하는데 금성동과 대주리는 동학사의 기록에 지명이 나올 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청주에 동학이 전파된 것은 의미가 크다.

첫째, 교조 최제우(崔濟愚)[1824~1863]의 처형 후 이른바 은도기라고 해서 강원도와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 산골지역을 따라 은밀히 포교해온 동학이 충청도의 평야지대로 퍼져나가면서 교세가 확대된 것을 보여준다. 1880년대 중반 이후 동학 조직은 충청도 전역과 경기도는 물론 전라도까지 확대된다.

둘째, 동학 교단의 중요 간부에 청주 출신이 등장하게 된다. 손천민, 서장옥(徐章玉), 임규호(任奎鎬), 손병희(孫秉熙)[1861~1922] 등이 동학에 들어가 최시형의 측근으로 활약하게 된다. 교조신원운동이 벌어지면서 국왕에게 상소문을 작성할 때 설치했던 봉소도소(奉疏都所)도 손천민의 근거지인 청원군 남일면 솔뫼에 두었다. 보은군 장내리 집회 이후 농민들이 가세해오는데 이 세력이 1894년 활약한 동학농민군의 중심이 된다.

[전개]

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은 1차 봉기, 집강소기, 2차 봉기로 구분된다. 전라도 고부민의 항쟁에서 촉발된 1차 봉기는 종래 농민항쟁이 군현의 경계를 넘지 못했던 것에 비해 여러 군현의 동학 조직이 참여한 형태로 시작되었다.

충청도에서는 회덕과 진잠에서 봉기하였으나 교단의 반대와 인근 군현의 조직이 호응하지 않고, 청주에서 파견된 진남영병이 순회해서 압박하자 해산하였다. 복합상소와 장내리집회 과정에서 온건과 급진 두 성향을 드러낸 남북접의 자세는 1차 봉기에서 명확히 나타났다.

청주의 대접주 손천민과 서장옥은 각각 좌포(坐包)와 기포(起包), 그리고 법포(法包)와 서포(徐包)를 대표하는 고위지도자였다. 청주의 동학이 1차 봉기에 가세하지 않은 것은 손천민의 영향이 더 컸던 것을 보여준다.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이 민정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을 개혁하던 시기에 충청도의 충주, 진천, 영동 등지에서 집강이란 직임으로 개혁을 주관하던 동학 지도자가 확인된다.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거하고 경군을 기습해서 무장 해제하는 사건과 아산 앞바다와 성환에서 청·일 간 전쟁이 벌어지면서 동학교도들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무장봉기를 준비하였다.

보은에서는 교단의 고위 지도자들이 동참하여 군수와 이방까지 참여하는 의병 결성을 8월 2일 제안하기도 하였다. 북접 영향 아래 있던 충청도와 경상도의 동학교도들이 무장봉기를 준비하면서 지방관아와 충돌하는 사건이 빈발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은 10월에 들어와 재봉기를 결정하고 전라북도 삼례를 집결지로 정했다. 최시형은 남접의 봉기에 호응하여 10월 16일 전국의 동학 조직에 기포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청주의 동학 조직은 즉각 무장 봉기에 나섰다. 청주성을 점거해서 청주목 관아와 진남영 병영을 장악하여 무기고에 보관된 화약과 총기를 탈취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10월 22일에 청주성을 포위해서 10월 27일까지 치열하게 공격하였다. 왕조정부에서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설치한 양호도순무영은 경리청과 장위영 병대를 청주에 급파하였고, 일본군은 후비보병 제19대대 중로군을 청주에 파병하였다. 청주성 공방전은 구원병이 도착하기 이전에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종료되었다.

청주 병사 이장회(李長會)가 신식무기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한 진남영 병정을 이끌고 반격해서 동학농민군은 오히려 수십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패산하였다. 청주 일대에서 밀려난 손천민 휘하의 동학농민군은 영동 황간의 북접농민군 주둔지로 집결해서 통령 손병희의 지휘 아래 논산으로 진군하여 남북접 연합농민군의 공주 공방전에 참가하였다.

그 직후 진남영 병대는 1894년 진압군측 최대의 피해를 입게 된다. 영관 염도희(廉道希)가 인솔한 장졸 72명에게 진잠, 공주 등 전라도 인접 지역을 순회시켰는데, 이 병대가 10월 31일 한밭 들판을 지날 때 회덕의 강건회(姜建會) 대접주가 지휘하는 동학농민군과 조우해서 전원 살해당한 것이다. 이들의 위패는 지금 모충사에 안치되어 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3중대와 대대본부로 편성된 중로군은 대대장 미나미(南小四郞) 소좌의 지휘 아래 11월 21일 청주에 들어왔다. 청주 병사 이장회는 문의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문의현 공격을 막아달라고 일본군에게 요청하였다. 문의의 동학농민군은 남북접 연합농민군의 공주 공격에 호응하여 청주 일대에서 북상로를 확보하려고 시도하였다.

일본군 중로군은 지명과 증약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15일 가량 문의와 옥천에서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는 공주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시기였는데 결국 일본군 중로군은 공주 공방전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일본군이 금산을 거쳐 전라도로 내려간 후에 남원에 주둔하던 김개남(金開南) 군 약 2만 5천여명이 진잠과 회덕, 그리고 신탄진을 거쳐 11월 13일 새벽 청주성으로 접근하였다. 진남영병만 지키던 청주성은 다시 위기에 처했으나 군로실측대를 호위하던 일본군 1개 소대의 지원을 받아 방어에 나섰다. 양측의 공방전은 일본군의 후방 기습 공격에 당황한 김개남 군이 후퇴함으로서 단시간에 종료되고 말았다.

[결과]

이후 청주 일대의 동학농민군은 청주성 공격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진남영 병대는 청주목 포교들과 함께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를 순회하며 가담자를 색출하였다. 손천민과 서장옥은 피신을 하였지만 1900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손병희는 피신에 성공하여 뒷날 천도교를 재건하게 된다.

[의의와 평가]

동학농민전쟁은 조선사회의 개혁과 대일전쟁을 목표로 동학농민군이 무장봉기해서 전개한 내전인 동시에 항일전쟁의 성격을 갖고 있다. 청주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여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이것은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변화하는 전환기에 구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변혁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한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완강하게 저항한 반일 투쟁에 청주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고 참여한 것을 보여준다. 비록 무기의 열세와 훈련 부족 때문에 근대무기와 고도의 훈련을 갖춘 일본군에 패배하였으나 그 정신은 일제 강점기 이후 국권회복과 자주국가의 위상을 바라던 사람들에게 면면히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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