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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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銅器時代 |
영어음역 | Cheongdonggi Sidae |
영어의미역 | Bronze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하문식 |
[정의]
일반적으로 청동을 이용하여 연모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살림을 꾸리던 시기.
[개설]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대체적으로 청동 단추, 청동 손칼 등 주조가 비교적 간단한 청동 유물을 만든 시기와 동검(銅劍)과 같은 청동 무기, 공구 등을 제작하던 시기로 구분한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맨처음 구리에 다른 광물을 섞지 않은 순동을 두드려서 치레걸이를 만들다가 차츰 아연이나 주석, 납 등을 합금하여 단단한 청동을 만들었다. 한국 청동기시대는 분포 지역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와 청동기의 제작 주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서 시대의 개념 문제, 시기와 범위가 다를 수 있다.
대체적으로 표지 유물인 동검을 기준으로 해석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옛 악기인 비파를 닮은 비파형동검을 가지고 그 분포 지역인 중국 동북지역까지 문화권을 설정하고 있다.
[기원]
청동기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합금술과 성분 분석 결과에 의하여 시베리아 청동기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많다. 연대는 최근의 활발한 연구 성과에 힘입어 기원전 15세기 경부터 청동기의 상한으로 해석한다.
살림살이는 당시의 집터가 대부분 낮은 구릉지대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웃에서 논농사와 밭농사를 하였던 것 같다. 또한 볍씨와 조, 수수, 기장, 보리 등의 곡물이 한꺼번에 찾아진다. 이 시기의 밭과 논 유구도 조사되었는데 밭은 이랑과 고랑이 뚜렷하고 논터는 규모가 작지만 저수 시설과 물길의 흔적이 뚜렷하다.
농기구는 반달돌칼, 갈판, 괭이, 보습, 나무괭이, 후치 등이 있는데 반달돌칼은 곡식의 이삭을 따는데 쓰인 것으로 곡식의 생태적인 측면이 고려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상당히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집터는 강 언저리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구릉지대에 있으며 앞 시기보다 크고 많은 집들이 한 곳에 모여 마을을 이룬다. 청동기시대 집터는 청주 내곡동 유적, 청주 향정동 유적처럼 대부분 네모꼴이지만 청주 봉명동 유적, 청원 내수리 유적,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는 집안 가운데에 타원형의 구덩이가 있는 둥근꼴이 발굴되어 주목된다.
화덕자리는 강자갈로 만들거나 흙으로 둑을 쌓은 것도 있지만 맨땅을 움푹 파서 만든 것도 있다. 바닥은 맨땅을 다지기도 하고 찰흙을 4~5㎝쯤 깐 다음 불에 구워 단단하게 한 것도 있다. 그리고 짚이나 풀을 엮어서 깔기도 하였는데 평양 남경 유적에서 그 흔적이 찾아진다.
한편 마을이 형성되고 생산활동이 활발하여 잉여 생산물이 있게 되자 집단 서로간에 갈등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마을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환호와 목책 등이 설치되었다. 환호 시설은 울산 검단리, 진주 대평리, 안성 반제리, 화성 동학산유적 등 전국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또 부여 송국리에서는 지름 20㎝쯤 되는 굵은 나무를 잇대어 만든 목책시설이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는 고인돌을 비롯하여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움무덤 그리고 독무덤 등이 있다.
고인돌은 커다란 돌을 가지고 만든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강을 낀 평지나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하고 있다. 만든 형태에 따라서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으로 나누어진다. 주로 민무늬토기와 붉은 간토기, 화살촉, 간돌검, 반달돌칼 등의 유물이 찾아지며, 드물게 청동 유물이 출토되기도 한다.
돌널무덤은 넙적하고 판판한 돌을 짜서 만든 것으로 대부분 풍화암반층을 파고 축조하였다.
움무덤과 독무덤은 청동기시대의 후기에 주로 만들어진 무덤이며, 다음 시기까지 계속 이어진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토기, 석기, 청동기 등이 있다. 대체적으로 살림의 쓰임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날이 날카로운 간석기가 널리 발달하였다. 토기는 찰흙의 바탕흙에 굵은 모래나 활석을 섞어서 구운 민무늬토기가 중심을 이루며, 생김새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청동기는 주조하기가 상당히 어려워 매우 적고 살림에 넓게 쓰이지 못해서 일부 사람들만 소유하였던 특수품으로 여겨진다.
민무늬토기는 음식을 끓이고 저장하며 담는 기능을 주로 가졌는데 생김새와 드러난 특징, 지역에 따라 붉은 간토기, 검은 간토기, 팽이토기, 화분토기, 구멍무늬토기, 덧띠토기, 미송리형 토기, 가락리형 토기, 송국리형 토기 등이 있다.
간석기는 쓰임새에 따라 농사를 짓는데 이용된 돌괭이, 돌낫, 반달돌칼과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데 쓴 돌도끼, 돌자귀, 돌끌, 돌대패날이 있다. 그리고 음식을 조리하는데 갈판과 갈돌이, 사냥이나 무기로는 간돌검·돌화살촉이 쓰였다. 이밖에 석기를 다듬는데 숫돌이, 실을 꼬는데 가락바퀴가 쓰였고 특수한 목적에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바퀴날도끼와 톱니날도끼가 있다.
청동기는 대부분 청동기시대 후기나 초기 철기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검은 이른 시기의 비파형동검과 이를 조형으로 한 한국식동검(세형동검), 부채날 도끼 청동 화살촉, 청동 단추가 있다. 그리고 한국 청동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거친무늬 거울과 잔무늬 거울도 있다.
[청동기 유적·유물]
청주지역은 가장자리와 가운데에 미호천(美湖川)과 무심천(無心川)이 흐르고 있으며 그 언저리에 구릉지대와 얕은 야산이 발달하여 있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집터는 내곡동 유적, 향정동 유적, 봉명동 유적, 가경동(佳景洞) 유적, 정북동 유적, 용정동 유적, 서촌동 유적이 있다. 청동기시대 청주지역에서 발굴된 집터는 평면 생김새가 대부분 네모꼴이며, 봉명동 유적에서는 네모꼴과 둥근꼴이 함께 조사되었다. 대체적으로 이른 시기의 집터로 판단되는 네모꼴의 집터가 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조사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강유역에서 만난 서북지역과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가 남쪽으로 전파되는데 점이적인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내곡동과 봉명동, 용정동 유적에서는 서북지역 청동기시대 토기의 특징을 간직한 겹입술에 짧은 빗금무늬가 새겨진 토기가 출토되어 문화의 전통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용정동 유적은 구릉의 긴 방향에 따라 집터가 자리잡은 입지조건, 기둥을 받쳤던 주춧돌의 확인, 여러 형태의 화덕자리 등이 찾아져 청주지역의 청동기시대 집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봉명동, 가경동(佳景洞), 용정동 유적에서 조사된 숯을 방사성탄소 연대측정한 결과 2,400~3,000B.P.로 밝혀져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 연대 설정에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다.
고인돌은 복대동 유적과 강서동 유적, 무덤은 비하동 유적, 사천동 유적, 봉명동 유적이 조사되었다. 이 시기의 다른 유적과 비교해 볼 때 고인돌을 비롯한 무덤유적은 조사가 많이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주로 살림을 꾸렸던 터전인 구릉지대가 도시화에 따른 개발 때문에 일찍 파괴되어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복대동과 강서동의 고인돌은 개석식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널리 분포하는 형식 가운데 하나이다.
비하동과 사천동 유적의 무덤은 풍화암반층을 파고 만든 돌널(돌넛널)무덤으로 판단된다. 특히 비하동 유적에서 나온 한국식동검, 검은 간토기, 덧띠 토기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봉명동 유적에서는 긴 타원형의 움을 파고 그 안에 막돌을 채우거나 가장자리를 쌓아서 만든 돌무덤이 5기 조사되었다. 이런 구조를 가진 무덤은 청주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조사되어 주목된다. 출토 유물은 민무늬토기 조각을 비롯하여 덧띠토기, 붉은 간토기 등 토기조각이 많으며, 흙그물추, 돌칼 조각들도 있다. 또 무덤방 안에서 숯이 찾아져 화장의 가능성도 시사한다.
이밖에도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조사된 산포지는 금천동 유적을 비롯하여 산성동 유적, 오동동 유적, 용담동 유적, 운동동 유적, 신성동 유적, 원평동 유적, 평동 유적 등이 있다. 유물 산포지에서는 민무늬토기와 돌도끼, 숫돌, 화살촉, 대패날 등 여러 가지의 석기들이 출토됐다.